매일신문

도심서 버린 쓰레기가 소년들에겐 '유일한 희망'

필리핀 리잘 로드리게스시 70여개 마을 주민 현지 취재

"아이들은 쓰레기 속에서 어떤 희망을 찾고 있을까." 필리핀 리잘 로드리게스의 한 쓰레기 마을에서 만난 소년이 무언가 부지런히 찾고 있다. 쓰레기 분류는 이곳 아이들에게 생존 그 자체다. 하루 종일 일해도 하루에 300페소(한화 7천500원 정도)를 벌기도 어렵다.

지난달 25일 오전 6시 필리핀 리잘 로드리게스시의 한 작은 동네. 마을의 새벽은 분주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한 대형 트럭이 수십 톤의 쓰레기가 쏟아내자마자 기다리던 어린 소년들은 익숙한 솜씨로 쓰레기 더미를 어깨에 메고 트럭 반대편으로 옮겼다. 코를 찌르는 썩은 냄새와 바닥에 질퍽이는 오물들은 이곳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버려진 쓰레기가 유일한 희망인 마을. 대구경북 아시안브릿지 자원봉사자 29명은 7월 빈곤이 희망을 삼킨 '쓰레기 마을'을 찾았다.

◆ 쓰레기에 의존하는 삶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50여㎞ 떨어진 로드리게스에는 마닐라에서 온 쓰레기가 모이는 종착역이 있다. 도시 빈민들이 쓰레기장에 터를 잡고 살면서 이름없는 마을 수십 곳이 형성됐다. 이날 오전 동네에서 만난 마이클 루세이요(27) 씨는 질문을 던지는 기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일에 열중했다. 맨손으로 파리가 바글거리는 쓰레기 더미에서 플라스틱을 골라냈다. 플라스틱을 건져낼 때마다 얼굴에 오물이 튀었지만 닦아낼 겨를도 없다. 네 식구의 가장인 루세이요 씨는 열살 때부터 쓰레기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쓰레기 수집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플라스틱 1㎏을 모아 팔면 10페소(한화 250원 정도), 고철은 40페소를 벌 수 있다. 하루에 300페소를 번다면 그날은 성공이다.

아이들도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자 아이들은 보통 열 살이 되면 일을 시작한다. 알렉스 알데사(16) 군도 마찬가지. 전구 유리를 돌로 깨 전선을 분리하고 있었다. 땡볕 아래 웃옷도 입지 않은 채 일하던 알데사 군은 "3년 전부터 일을 시작했다"며 희뿌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마을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쓰레기에서 얻는다. 집 사이 경계를 표시하는 담장은 녹슨 침대 매트리스 용수철이다. 집 안 부엌에는 가스레인지 대신 불씨가 꺼진 숯불이 녹슨 냄비를 지탱했다. 부엌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변기에서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조차 포기해야 할 만큼 열악한 환경. 집주인 리사 살라홉(30·여) 씨는 집주인에게 쫓겨난 뒤 3년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 그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로드리게스 지역에 있는 쓰레기 마을은 70여 곳을 헤아린다. 마을마다 100가구 안팎이 살고 있다. 이곳 마을 대표 제럴드 셀데비아(25) 씨는 "정부는 우리를 홈리스(homeless)라고 규정하면서도 겨울철에 음식을 조금 가져다줄 뿐 아무런 지원이 없다"며 "쓰레기장을 벗어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 처절한 빈곤의 늪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물 문제다. 마을 뒤쪽에 지하수 펌프가 있다. 하지만 땅속 깊숙한 곳도 쓰레기로 오염된 탓에 지하수를 마실 수는 없다. 마을 앞 도로만 건너면 마닐라 상수원이 있지만 수도관이 연결돼 있지 않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때문에 쓰레기를 분류해서 번 돈은 급수차를 불러 마실 물을 사는데 대부분 사용된다. 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지하수를 그냥 마셔야 한다.

오염된 물은 생명을 위협한다. 지하수 펌프가 있는 곳에서 5분 정도 걸어가자 쓰레기와 배설물로 오염된 웅덩이가 나타났다.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 사람들은 웅덩이에 상습적으로 배설을 한다. 결국 이곳이 뎅기열을 옮기는 뎅기모기의 주요 서식지가 됐다.

웅덩이 주변 주민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루를 살고 있다. 2년째 쓰레기마을에서 봉사를 하는 주일중(46) 선교사는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차적인 문제는 오염된 물이며, 마을 아이들은 공부와 학교를 꿈꾸기 전에 모기에 물려 죽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절대적 빈곤'을 눈으로 확인한 봉사자들은 이날 마을 아이들에게 '목욕 봉사'를 했다. 목욕 소식을 들은 옆 마을 주민들도 아이를 품에 안고 찾아왔다. 때문에 당초 100여 명으로 예상했던 목욕 대상자는 2시간 만에 200명 가까이로 늘었다. 아이들의 몸에 물을 붓고, 비누칠을 하고 새 옷을 입히는 봉사자들의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됐지만 웃음꽃이 피어났다.

자원봉사자 최다정(19·여·대구대 관광경영학과 1학년) 씨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사람은 모두 똑같은 인격체인데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령은(23·여·경북대 국어국문학과 휴학생) 씨는 "먹을 물이 없어서 사람이 죽어가는 필리핀의 가난은 완전한 절망"이라며 "여태까지 내가 부자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곳 주민들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풍요로운 환경에서 사는지 알게 됐다"고 밝혔다.

필리핀 리잘 로드리게스에서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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