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행복 칼럼] 친구야 친구야2

적십자병원을 그만둘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6년 동안 친했던 외국인 노동자들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이별 여행은 바다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버스를 빌리고 식사와 간식을 장만하자니 경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역시 든든한 나의 친구들이다. 내 걱정을 들은 동일철강, 온앤온 여성의류, 아카데미 극장 등을 운영하는 친구들이 여행 경비를 대주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병원 직원들도 그들의 품을 적선해준다. 같은 동양인들이어선지 피부색과 말은 달라도 노는 모습은 우리와 똑같다. 고속도로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특기자랑이라고 시작한 게 노래와 춤 자랑이 됐다.

어떤 사람은 기타, 하모니카까지 갖고 와 분위기를 돋우었다. 대개 자기 나라 노래였지만 우리 가요를 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음도 정확했다. 오락 진행은 방사선과 팀장이 진행했는데 김 선생은 일요일 진료마다 자원봉사를 한 탓에 모두들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 덕에 특기자랑은 우리말이 어색하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재미있게 이뤄졌다.

구룡포에 도착하니 다 큰 어른들이 마치 꺼병이처럼 바닷가에 흩어져 웃고 떠들고 뛰어다녔다. 김밥과 통닭 튀김을 점심으로 나눠주었다. 동남아 노동자들이 김밥 먹는 모습을 보며 옛일이 생각나 혼자 웃었다. 외국인 무료진료 초창기에 점심으로 김밥을 쌓아두었는데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밥을 먹어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은 우리나라와 일본만 먹는다.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닭튀김이었고 다음으로는 바나나였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착해 빠져 제 먹을 만큼 먹고 나면 나머지 음식은 싸주어도 거절했다. 가장 많이 남는 음식이 돼지고기와 즉석 라면이었다. 돼지고기는 종교적 문제로 이해됐지만 라면을 먹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공장에서 하도 많이 먹어 여기서는 꼴도 보기 싫다는 이야기였다.

이별 여행 멤버 중에는 내가 주례를 서 준 부부가 있었는데 벌써 애가 둘이다. 이 부부는 날 아버지라 부른다. 그날 바닷바람에 애들이 감기 들까 걱정하는 내 모습에서 이미 그들과는 한가족이 되었음을 느꼈다.

저녁은 약전 골목에 있는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뒤풀이 겸 해단식을 했다. 아직 우리말이 서툰 사람들이 많아 그날 모임의 뜻을 잘 모르고 앞으로도 자주 놀러 가자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에 오늘 경비는 원장 친구들이 부담했다고 김 선생이 말하니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내 친구들은 그 박수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늘 이 글을 통해 그 박수와 함성의 소리를 보낸다. 그 친구들이 항상 나를 발전하게 한다.

권영재 미주병원 진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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