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4부-노블레스 오블리주 4)안동 선비 백하 김대락

"선비는 세상에 책임지녀야" 門中 이끌고 만주로 망명, 독립 전초기지

김대락이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제공했던 옛집인 백하구려(白下舊廬)에서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한 후손 김시중(75) 씨와 김윤대(64
김대락이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제공했던 옛집인 백하구려(白下舊廬)에서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한 후손 김시중(75) 씨와 김윤대(64'천진리 이장)'김수대(57) 씨 등 문중 인사들.
안동인의 만주망명 경로.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서간도 망명길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안동인의 만주망명 경로.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서간도 망명길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1911년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에서 열린 경학사 결성대회 디오라마.(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1911년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에서 열린 경학사 결성대회 디오라마.(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大韓書)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때 끼고 녹슨 거울 비춰볼 수 없어서/ 오랫동안 서랍 속에 버려두었다가/ 때 벗기고 닦아내어 옛 모습 되살리니/ 비로소 알았노라 청동거울 원래는 밝은 것을/……'(대한협회서를 읽고).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은 칠십을 바라보는 노유(老儒)로 전통 유림사상을 계승한 위정척사론자였다. 안동 명문가 출신의 그토록 꼬장꼬장한 선비를 혁신유림으로 바꿔놓은 것은 바로 대한협회보였다.

상기(上記)한 독대한협회서유감(讀大韓協會書有感)은 그가 대한협회보 논설을 읽고 각성한 눈물의 고백이다. 이렇게 혁신적인 사고로 극적인 전환을 이룬 백하는 자신의 거처를 신식학교 교사로 내놓으며 안동 유림사회의 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동의 꼬장꼬장한 선비

백하는 나라가 망하자 향중의 혁신유림들과 함께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 위해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청년학생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자치단체를 조직하며, 한인사회의 최고 어른으로서 전통과 근대 사상이 공존하는 사회상을 제시했다.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인 양반으로서, 지식인인 선비로서 그가 보여준 변화와 실천의 삶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사례로 남아있다. 백하는 일찍이 퇴계가 강조했던 "선비란 기본적으로 '천하를 잊지 못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선비는 세상 밖으로 물러난 은자가 아니라, 항상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실천에 옮긴 인물이었다.

백하는 1845년(헌종 11년) 안동 임하면 천전리 속칭 내앞마을에서 권문세가인 의성 김씨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백하의 집은 아버지가 금부도사를 지내 '도사댁'으로 불렸는데, '사람 천석'글 천석'살림 천석'이라 해서 '삼천석댁'으로 유명세를 자랑할 만큼 학문과 경제력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다.

백하가 23세 때의 호구단자를 보면 도사댁은 솔거노비와 외거노비 3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들 노비들이 안동 일직과 선산'풍기'순흥에도 거주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뤄 이 지역에도 상당한 토지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백하는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헌수와 숙부 김진기, 족숙 서산 김흥락 등에게 수학했다. 이들은 모두 안동의 대유(大儒)들과 교류하던 내앞마을의 대학자였다.

특히 숙부는 개항기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운동가였고, 족숙인 김흥락은 위정척사사상에 바탕을 두고 의병항쟁을 지휘하던 인물이다. 백하는 이처럼 살림 좋은 양반가의 후손으로 구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며 60 평생 수구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인생 후반기에 나라가 기울면서 그의 주변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1907년 마을에 근대식학교인 협동학교가 들어서고, 상투를 자른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신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강하게 비판했던 백하에게 의식의 변화를 초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매부인 석주 이상룡이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을 추진한 것이었다. 이 무렵 대한협회보를 읽은 백하는 평생 전통유림으로 살아온 노선비로서는 실로 혁명적인 사상의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협동학교의 신교육이야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때에 따른 올바른 조치) 시중지도(時中之道'때에 맞는 도리)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깨달음은 곧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학교의 확장에 노력한 것이다. 당시 황성신문은 그의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두고 '교남교육계의 새로운 붉은 깃발'이라 칭송했다. 백하의 변화는 안동의 향중은 물론 영남유림 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고난의 망명길

백하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또 한 번의 고된 길을 선택했다. 한편에서는 척사유림들의 자진과 장례가 이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화 인사들의 해외독립군기지 건설론이 가시화되고 있을 때였다.

특히 향중의 원로인 향산 이만도의 자정순국은 충격적이었다. 이만도는 셋째 매부인 이중업의 아버지이다. 게다가 이중업은 조카인 만식의 장인이 아닌가. 고민 끝에 백하는 만주로 망명길을 택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겨울 칼바람 속에 고향을 떠났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는 "백하의 만주 망명은 유가적(儒家的) 색채가 짙다"며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즉 도(道)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自靖)의 삶을 지향하겠다는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라고 평가했다. 식민지하에서는 살기도 싫었고 죽어서 묻히기도 싫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의지는 망명길에 만삭의 임부였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울진으로 출가한 손녀는 평해 황씨 해월공파(사동) 종부였다. 망명 중인 만주 회인현 항도촌(현재의 환인현 횡도천)에서 증손자와 외증손자를 보았을 때도 식민지(고향)에서 해산하지 않아 오히려 통쾌해했다.

백하가 고향을 떠날 때의 상황은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그가 지은 분통가(憤痛歌)에 당시를 회상하는 구절이 조금 남아있다. '8대 선조의 무덤과 사당은 동생과 조카에게 맡기고, 세전 재물을 급하게 팔아 가지고, 저택과 90 노인인 숙부와 하나 남은 동생을 작별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읊은 것이다.

백하가 주도한 망명길에는 내앞문중의 많은 인사들이 함께했다. 동생인 김효락의 아들 만식'제식 형제, 김소락의 아들 조식'홍식'정식 3형제, 김정락의 아들 규식이 망명을 도왔고 서간도에서 활동했다.

이외에도 화식'문식'영식 등 종질들과 창로'정로 등 손자, 문로'성로 등 종손자, 긍식'성로 등 문중의 청장년 수십 명이 함께 망명길에 오른 것을 보면 가문과 문중에서 백하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백하는 1910년 12월 24일 고향 내앞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열흘간 머물다가 이듬해인 1911년 1월 6일 오전 9시에 남대문역(서울역)에서 의주로 출발했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백마역에 이르러 시골 여관에서 숙식을 하고 이튿날 걸어서 30리 떨어진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에 이르렀다.

8일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들어갔고, 11일 회인현 항도촌으로 가기 위해 마차를 빌렸다. 항도촌으로 가는 540여 리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북방의 추위는 뼛속까지 시렸다. 그보다 더한 것은 나라 잃은 서러움이었다.

15일 오후 항도촌에 이르러 미리 도착한 사동의 황씨 문중과 뒤이어 2월 5일 도착한 안동의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의 가문과 합류했다. 석주는 백하의 매부이고, 석주의 조카 이문형은 종손서(효락의 아들 만식의 사위)였다. 또 황만영'황도영'황의영 종형제는 백하의 손서인 사동 종손 황병일의 숙부들이며, 손자 정로가 바로 황만영의 사위가 되었으니 겹겹이 혼인으로 연결되는 관계였다.

백하는 4월 10일 출발해 9일 만인 19일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했다. 안동을 떠난 지 넉 달 만에야 꿈의 터전인 새로운 개척지 삼원포에 정착한 것이다. 이제는 안정된 한인사회의 건설이 가장 절실한 과제였다.

튼실한 한인사회는 곧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인력과 물자의 공급기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영'이회영 등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협의해서 서간도 지역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또 독립군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백하는 몇 차례나 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학생들에게 면학을 독려하는 권유문을 지었다. 여기서 백하는 망명 후 또 한 번의 사상적 진화를 보여준다.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儒家)의 가르침인 사생취의(捨生取義'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을 함)의 도리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선비정신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자로 변화한 것이다.

1912년 2월 초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한 백하는 한인지도자들과 함께 6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열어 후일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는 많은 군인들을 길러냈으며, 간도참변으로 한인사회가 무너진 1920년까지 독립군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다.

◆백두산 아래에 살다

백하는 1911년 1월 6일부터 1913년 12월 30일까지의 파란 많은 망명 여정을 그린 '백하일기'(白下日記)에 이 같은 내용을 소상하게 남기고 있다. 백하(白下)란 호 또한 백두산(白頭山) 아래에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합니하에 머물던 1912년 9월 말부터 백하는 '분통가'를 작성했다. 같은 해 9월 27일자 백하일기에는 '나의 슬프고 분함을 부녀자와 역사가에게 전하고 싶어 국문으로 분통가 한 편을 짓는다'고 쓰고 있다. 분통가는 총 400행으로 망국의 한과 망명의 사연, 영웅장사와 의열에 대한 칭송, 독립전쟁과 광복의 노래를 담고 있다.

1913년 2월 다시 삼원포 남산으로 돌아온 백하는 왕삼덕'김동삼 등과 새로운 자치조직인 공리회(共理會)를 결성하고 취지서를 작성했다. 경학사가 무너지고 온갖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동포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였다.

백하가 지향했던 자치단체는 '도(道)와 덕(德)'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사회였다. 이것이 바로 백하가 꿈꿨던 만주망명 한인사회의 모습이었다.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은 "백하가 생애 말기인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전개했던 민족운동의 공통된 특징은 근대 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도 논리의 기초는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변화하는 역사의 새로운 기운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그 축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하는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눈을 감았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 내앞마을과 전통과 근대가 조화를 이룬 한인사회의 실현을 뒤로한 채…. 내앞마을 백하구려(白下舊廬)에서 만난 후손 김시중(75) 씨는 "지난해 6월 만주 항일운동유적지 탐방차 삼원포를 찾았지만 끝내 백하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지 못한채 남산 아래에서 재배하고 돌아왔다"며 "신흥무관학교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 하나 보이지 않았다"고 울먹였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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