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혁명'보다 '낭만'이 어울렸던 임화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우리의 깃발을….'

해방 후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인민항쟁가'다. 섬뜩한 노랫말을 쓴 이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주도한 임화(본명 임인식'1908~1953)다. 말과 글은 전투적이었지만, 삶은 혁명과는 거리 먼 인물이었다.

"보성고보 시절 반들반들하게 면도하고 휘파람을 불고 다니면서 여학생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고보 4학년 때 동아일보에 등단했고 최근 유행한 민중시도 1920, 30년대 그의 손에서 이미 완성됐을 정도로 문재가 뛰어났다. 영화 2편의 주연배우였다. 갸름한 얼굴의 꽃미남에 '조선의 발렌티노'(1920년대 요절한 할리우드 배우)로 불리며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섹시보이였다. 머리가 텅 빈 요즘 꽃미남들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월북을 택하면서 비극적 결말이 예고돼 있었다. 1953년 오늘, 남로당이 숙청되면서 고문과 치욕 속에 '미제의 스파이'로 몰려 총살도 아닌, 교수형으로 죽었다.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 여기는 종로네거리/ 나는 왔다….'('다시 네거리에서') 이 시처럼 낭만적으로 살다 갔어야 행복했을 것이다.

박병선(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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