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지금은 못 갚고, 나중에 갚을게."(디폴트 선언)라는 말을 하기 직전까지 갔다. 개인 대 개인의 금전거래였다면 대단한 신뢰 추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부자라고 소문난 미국이 이 말을 하기 직전까지 갔다. 디폴트 선언 직전에 부채 한도 증액에 합의를 이뤘다. 하지만 "미안하다. 지금은 못 갚고, 나중에 갚을게"라는 말을 다음으로 미뤘다는 우려가 팽배할 정도로 미국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미국 백악관과 의회가 연방정부 부채 상한 증액 협상을 타결해 국가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는 피하게 됐다. 급한 불은 껐지만 이번 타결이 불어나는 재정적자를 막기에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디폴트는 피했지만 신용평가사들이 경고했던 신용등급 강등을 막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는 분석도 여전하다.
◆디폴트 막기는 했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상'하원의 여야 지도자들이 재정적자를 감축하고 디폴트를 막기 위한 방안에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양당 합의안에 따르면 부채 한도를 최소 2조1천억달러까지 증액하고 연방 정부의 지출을 2조4천억달러 이상 감축하는 것이 골자다. 부채 한도는 당장 9천억달러 늘리고, 2013년까지 단계적으로 총 2조1천억달러를 확대하기로 했다. 2조4천억달러의 정부 지출 감축은 향후 10년간 2단계에 걸쳐 이뤄진다. 재량 지출부터 감축 대상에 포함될 예정이다. 물론 이런 계산은 2013년까지 국내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는 게 전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합의로 "정부 지출은 (반세기 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 될 것"이라며 "양당 지도부는 적자를 줄이고, 우리 경제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디폴트를 회피하는 방안에 합의했다"며 협상 타결 사실을 발표했다. 3개월여간 표류하던 협상은 2일까지 부채 한도를 늘리지 못하면 정부가 디폴트에 빠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타협점을 내놓은 것이었다.
합의를 통해 발표된 향후 10년간 총 지출 삭감 규모는 무려 2조4천170억달러. 하지만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미 정부가 같은 기간 재정적자를 4조달러 감축해야 국채 최고등급(AAA)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이런 계산법이라면 10년간 1조6천억달러의 차이로 매년 1천600억달러를 줄여야 한다는 셈이다. 단순 계산으로 퇴직군인 연금 및 보훈 예산(1천500억달러)을 10년간 지급정지한다면 달성할 수 있는 수치다.
◆앞날이 걱정
이번 합의안에는 민주당이 주장해온 증세안이 빠졌다. 민감한 주요 사회복지비 지출 삭감도 미뤘다. 국내총생산(GDP)의 100%에 육박하는 부채 문제의 근본적 해결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액면대로 보면 부채 한도를 올린 것이라 오히려 빚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빚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증세 없이 재정 건전성을 높이겠다는 방안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 물론 경제성장을 통한 세수 확보라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미국 경제성장률은 이에 대한 기대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1.3%에 불과했다.
사실 미국의 조세부담률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조세부담률은 2009년 기준으로 미국이 24%로 캐나다의 31%, 영국의 34%, 프랑스의 42%, 독일의 43.5%보다 훨씬 낮다. 심지어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제너럴 일렉트릭(GE)은 지난 2010년 140억달러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단 한 푼의 법인세도 물지 않았다.
세금(수입)을 더 걷지 않겠다면 정부의 재정 지출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세출구조상 법으로 묶여 있는 예산이 대부분이고 경상사업비와 국방비(6천800억달러)를 제외하면 손댈 수 있는 항목이 없다. 국방비 중 1천500억달러도 퇴직군인 연금 및 보훈 예산. 나머지는 군인 급여 및 기본 시설 유지비로 결국 군축이 답이다. 이른바 개발 예산인 경상사업비마저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기부양책을 마련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합의안에 대해 글로벌 경제의 눈은 비관 쪽으로 몰리고 있다. 미국의 2분기 GDP 성장률이 1.3%에 그쳤고, 당초 1.9%로 발표했던 1분기 GDP도 0.4%로 하향 조정하는 등 경제 회복 속도가 더뎌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지표가 개선되지 않으면 부채 협상 타결 효과도 단기에 그칠 것이라는 시각이 압도적인 이유다.
◆강 건너 불구경할 수도 없는 일
미국 정부가 지출을 줄인다는 것은 경기 부양을 위한 도구가 하나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협상안으로 미국 경기 둔화가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은 고실업'저성장 상태다.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올 1분기(0.4%)와 2분기(1.3%) 모두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실업률은 9%대를 이어가고 있다. 6월 실업률은 9.2%로 올해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미국 경제의 동력이라고 불리던 소비마저 줄었다. 미국의 6월 소비지출은 전월보다 0.2% 줄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지출을 줄이면 정부 돈으로 만든 각종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고 일자리 축소로 실업률은 상승하고, 소비가 줄어들게 된다. 소비 저하는 결국 기업들의 투자 기피로 이어져 경기 부양은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여기에 국가 신용등급 부정적 전망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신용등급이 낮아져 국채 비용이 늘어나면 정부 적자를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번 디폴트 수모는 세금에 비해 쓰임새가 과도하면 언젠가는 위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공식이 입증된 것이다. 가계도 마찬가지지만 국가가 빚을 갚지 못하는 상태가 이른바 국가파산 또는 국가부도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화폐를 찍어내면 하이퍼인플레이션과 통화가치 폭락을 불러온다. 연방부채 상한 증액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힘겨루기를 벌였던 미국이 그제 여야의 전격 합의로 디폴트 위기를 넘겼지만 국가채무 비율은 95%로 우려의 시각은 여전하다.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 대신 발빠르게 금을 매입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는 점은 이 같은 불안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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