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대구를 가꾼 주인공' '대구 지킴이' '녹색사랑, 대구사랑을 실천해 온 공직자'
회색 도시였던 대구를 녹색 도시로 탈바꿈 시킨 이정웅(66'대구시 북구 태전동) 전 대구시 녹지과장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공무원으로 재직 중일 때 바지런한 일꾼으로 소문이 났던 그는 퇴직 후 사회적 기업 '대구신천에스파스사업단' 자문위원장, '달구벌 얼찾는 모임' 대표로 여전히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열정적인 그의 삶은 첫인상에서도 고스란히 묻어 났다. 그를 만났을 때 티셔츠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신천에스파스에서 일을 마친 뒤 인터뷰 장소로 바로 왔기 때문이다. 검게 그을린 팔과 구릿빛 얼굴은 퇴직 후 그의 삶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나무와 함께 한 공직 34년
이 씨는 1969년 산림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대학 진학 대신 선택한 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공직생활은 이후 대구에 녹색 혁명을 불러 일으키는 단초가 됐다. 이 씨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푸른 대구가꾸기' 운동을 주도하며 654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이 씨가 본격적으로 녹지사업을 시작한 것은 민선 1기가 시작된 1995년이다. 당시 대구시청 녹지계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그는 문희갑 시장으로부터 "대구 녹지의 기본틀을 다시 짜라"는 지시를 받고 첫 계획서를 만들었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문 시장의 호된 질책을 들은 그는 구'군 녹지계장을 모두 소집해 밤샘작업을 하며 청사진을 새로 만들었다. 이 씨가 만든 청사진은 지금도 대구시 녹지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을 만큼 내용면에서 탄탄하다. 그는 나무를 한 그루라도 더 심기 위해 8m 간격으로 가로수를 심도록 되어 있는 정부 지침 대신 6m 간격으로 가로수를 심도록 계획을 짰다. 교통섬에도 조경을 해 도로에 푸른 활력도 불어 넣었다. 또 환경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수목원을 개원했으며 삭막한 신천동로 벽에 담쟁이를 심고 대구의 한 시민단체가 시작한 담장허물기 사업도 제도화시켰다.
"수목원 사업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쓰레기매립장에 수목원을 건설한다는 발표가 나자 대구 사회는 요동을 쳤습니다. 가스가 분출되고 침출수가 나오는 곳에 수목원을 조성하면 식물이 자랄 수 없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본의 성공 사례를 둘러본 뒤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경북대에 의뢰한 타당성 조사 결과도 긍정적으로 나왔습니다. 시장님도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IMF 여파로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예산뿐 아니라 인력을 파격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대구수목원은 지금 대구시민의 휴식처이자 명소가 됐다.
2003년 5월 대구시 녹지과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기까지 대구에 녹색 바람을 일으킨 이 씨의 노력 덕택에 대구는 폭염도시라는 오명을 조금 벗었다. 하절기 대구 도심 평균 기온이 1~2℃ 낮아졌기 때문.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고 했다. "대구 도심 온도가 낮아진 것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신천유지수를 높이고 인공폭포와 분수를 곳곳에 설치한 것이 녹지공간의 확대와 맞물려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대구가 녹색도시로 탈바꿈 되지는 않습니다."
◆퇴직 후에도 이어진 자연사랑
퇴직 후 그는 자연인으로 살고 있다.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신천에스파스로 출근해 생태공원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열정은 한여름 퇴약볕도 무색하게 만든다. 그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신천에스파스에 머물며 잡초를 뽑고 화초에 물을 주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2만여㎡의 신천에스파스에서 그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생태공원 신천에스파스는 퇴직 후 얻은 이 씨의 일터다. 이 씨가 신천에스파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7년이다. 녹지과장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신천에스파스 조성에 힘을 보탰다. 이 씨는 대구수목원에서 종자를 가져와 직접 씨를 뿌리고 '자라풀' '삼백초' '가시연' 등 희귀식물까지 구해 신천에스파스에 심었다. 신천에스파스가 시민들에게는 도심 속 휴식처로, 청소년에게는 체험학습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노력이 있었다.
◆글쓰기는 그의 또 다른 일
이 씨는 1992년 '며느리 밥풀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팔공산을 아십니까'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 '아름다운 야생화'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 '나무들이 들려주는 푸른대구이야기' '대구경북의 명목을 찾아서' 등 7권의 책을 펴냈다. 2004년에는 '계간문학' 통해 수필가로 등단까지 했다. 취미를 넘어 글쓰기가 또 다른 일이 된 셈이다.
이 씨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할 정도로 글쓰기에 취미를 갖고 있었지만 일에 쫓겨 글쓰는 일을 사실상 접고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푸른 대구가꾸기와 무관하지 않다. 푸른 대구가꾸기 운동이 시작될 당시 대구의 도로변 꽃 조경은 봄에는 팬지, 가을에는 사루비아, 겨울에는 꽃양배추로 정형화 되어 있었다. 그는 예쁜 우리꽃을 활용해 도로변 조경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야생화 공부를 시작했다. "도로변에 심어도 잘 자라는 우리꽃을 찾기 위해 퇴근 후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야생화책만 봤습니다. 야생화를 알기 위해 야생화를 소재로 한 시도 300여 편 읽었습니다. 야생화 공부를 하면서 느낀 점을 시로 적어 엮은 책이 '며느리 밥풀꽃'이었습니다." 획일화된 틀을 깨려는 이 씨의 노력으로 대구의 도로변 꽃 조경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현재 동대구로에 맥문동, 동아쇼핑 앞 달구벌대로에 원추리'옥잠화가 심어져 있는 것은 이 씨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결과다.
현재 이 씨는 노거수를 소재로 한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다. 그는 2009년 '대구경북의 명목을 찾아서'를 펴낸 후 바로 노거수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신천에스파스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면 유명한 노거수를 찾아 전국을 다니고 있다. 경상도뿐 아니라 강원도'전라도'충청도를 누비며 지금까지 찾아낸 노거수는 60여 그루. 그는 책으로 펴내기 전 매일신문(주간매일 6면-노거수와 사람들)을 통해 연재를 하고 있다. "영양 두들마을에는 구휼 참나무가 있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로 죽을 쒀 기근을 해결할 목적으로 음식 디미방을 쓴 장씨 부인이 심었다고 합니다. 제가 노거수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노거수에 선조들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재야 향토사학자가 된 사연
이 씨가 향토 역사에 쏟는 애정은 대단하다. 그가 펴낸 책 가운데 '팔공산을 아십니까'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는 향토 관련 역사서다. 그는 산림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향토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옛날 산림공무원의 주 업무는 산불 감시와 산불 진화였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 효과적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산을 구석구석 다니게 되었고 무관심 속에 방치된 문화재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잊혀져 가는 문화재를 보면서 저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퇴직 후 이 씨는 '달구벌 얼찾는 모임'을 결성해 아예 재야 향토사학자로 변신했다. '달구벌 얼찾는 모임'은 대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공무원'직장인'문화유산해설사 등이 만든 단체. 단체를 이끌고 있는 이 씨에게 대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것이 대구의 정체성인데 대구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도시로 인식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고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대구는 개방적이고 이타적인 도시였습니다. 당나라 장수 두사충, 일본 장수 김충선 등 일찌감치 이민족의 귀화를 받아들인 곳이 대구입니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대립하고 있을 때에도 대구에는 양 학파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전라도 출신 조재천 씨가 대구에서 세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례도 있습니다. 한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도 대구입니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수구꼴통'이라는 이미지는 정치 논리가 만들어 낸 허구입니다. 어느 도시 보다 열린 도시가 대구입니다."
그는 대구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체가 없는 말에 현혹되고 있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부족합니다. 대구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구의 역사성을 살려야 합니다. 대구는 민족시인 이상화, 소설가 현진건, 음악가 박태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입니다. 이들이 남긴 발자취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 달구벌 얼을 찾는 첫걸음입니다."
이 씨는 달구벌 얼찾기의 일환으로 시간이 나면 대구 인물사를 정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문중마다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발굴해 정리하면 대구의 정체성 확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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