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소중한 날의 행진곡, 소중한 날의 꿈

후텁지근한 날씨가 이어져 안팎으로 지쳐가는 시절이다. 때로는 끊임 없는 몰입을 채근하는 소설에 물리고, 한없는 상상력을 부추기는 시에 질리기도 한다. 너무 끈적거리는 장황설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혹은 너무 말갛게 비어 있는 여백으로 머리조차 함께 비워진 듯 막막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찾아서라도 동화책을 집어든다. 적당히 비워주고 메워주는 곰살가운 품안에서 토끼잠이라도 자고 나면, 달아났던 입맛도 금세 되돌아오고 천근만근이던 어깨도 감쪽같이 거뜬해질 것만 같다. 비록 한여름 날의 백일몽처럼 짧고 허망하다 하더라도, 그 설렘만큼은 여전히 달콤새큼한 유혹이다.

'소중한 날의 꿈'(Green Days, 2011)은 유치한 순정만화이자 찬란한 성장기 동화다. 땅을 딛고 달려야만 하는 소녀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키우고 사는 소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다 넘어지고 꺾인 꿈을 추스르고 일어서는 성장통이 날줄 씨줄로 엮어진, 바로 푸르던 날들의 노래다. 달리기 결승점을 앞두고 뒤처지자 지레 주저앉아버렸던 치욕의 늪에서 마냥 허우적거리던 소녀 이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더욱 주눅들게 하는 '까도녀', 서울에서 전학을 온 까칠하고도 도도한 여자 수민의 등장. 마음을 편하게도 설레게도 하는 꺼벙이, 엄벙덤벙하면서도 야무진 꿈을 키워가는 철수와의 만남. 이 세 명의 청춘이 빚어내는 유치찬란한 시간과 아련한 공간에 바치는 비망록이다. 까닭 모를 절망과 근거 없는 자신감, 혹은 우스꽝스러운 쭈뼛거림과 웃기는 열정들이 어울린 기묘한 행진곡. 김일의 박치기가 번득이는 흑백 TV, 꿈속을 넘나들며 눈물짓게 하던 '러브 스토리' 눈밭 장면 등의 눈 익은 삽화들까지. 가히 지친 '7080세대'들을 위한 성찬이 화면 구석구석으로 담담한 듯 풍성하게 펼쳐진다.

막을 내리면서 올라오는 '연필로 명상하기'라는 낯설고도 정겨운 제작사의 이름 앞에서 다시 한 번 미소가 번져 나온다. 10만 장이 넘는 그림을 한 땀 한 땀씩 10년 넘는 세월 동안 연필 하나로 쌓아온 미욱스러움과 무모함이라니. "애틋한 향수 속에 자리한 웃음과 담담한 스타일의 그림체!"라는 환호성 사이로 배어 나오던 "강한 자극을 원하는 세대에게 담백한 복고 성향이 어떻게 어필할까?"라는 걱정은 기우였다. '그땐 그랬지'라는 빛바랜 진혼곡이 아니라 '남루한 인생의 빛나는 청춘'을 위한, 아직 끝나지 않은 행진곡인 까닭이다. 쌍쌍으로, 혹은 삼삼오오 무리지은 젊은이들로 동성아트홀은 간만에 북적거렸다.

"꿈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핀잔과 "꿈 깨!"라는 유구한 호통에서 자유로울 청춘이 예나 지금이나 몇이나 될까?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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