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곡역에서 하룻밤을 술에 취해 자고
반나절 만에 요성역에 도착하여 말을 세우고 쉬었다.
시골로 돌아온 원적은 부질없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고,
쓸쓸한 처지에 있던 상여는 게으른 모습으로 놀러 다녔다.
이 역참의 아전들은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느라 어느날 쉴 것이며,
국가의 사신들은 분주히 오가니 어느 때 조용할 것인가?
오직 나는 다행스럽게도 한가로이 여행하는 자이므로,
이곳에 올 때도 남을 귀찮게 하지 않았고 갈 때도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다.
*원적(阮籍):위나라 사람으로 죽림칠현 중 한 사람. *상여(相如):성은 사마이며 전한 무제 때 사람.
고려시대 대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1196년 29세 때 유곡역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여행의 정취를 읊은 시를 남겼다. 유곡역은 과거 영남사람들이 한양길에 오르면서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 다 모였던 곳이다. 한양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영남 각 고을로 흩어지기 전에도 제일 먼저 이곳에 모였다. 바로 문경 유곡동의 유곡역도(幽谷驛道)다. 문경새재와 함께 영남에서 서울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요지에 있었기에 영남대로의 '허브'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국 최고의 역도 유곡역도
역은 조선시대 가장 큰 육상 교통기관이다. 중앙과 지방 간의 어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했다. 또 사신이 왕래할 때는 안내와 접대, 숙박의 편의를 제공한 곳이다. 길을 오가는 이들이나 범죄인을 검색하는 역할도 역의 몫이었다.
조선에는 41역로, 524속역 체제의 전국적인 역로망이 있었는데 역로를 관장하는 찰방역을 중심으로 속역을 뒀다.
찰방역인 유곡역은 경상북도의 문경, 상주, 의성, 예천, 안동, 구미, 군위, 청송 등 20여 개의 속역을 관리해 지금으로 말하면 우체국 경북지사와 한국철도공사 경북지사를 합해 놓은 것쯤 됐을 것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국가공무원인 역리(역 종사원)가 3천 명, 노비가 800여 명에 달했으니, 유곡역 규모와 중요성을 나타내주는 대목이며 주변 지역민들과 합치면 일찍이 유곡마을은 만호(萬戶)지지(地址)였다.
유곡역은 종6품 찰방이 관장했는데 현감과 같은 급이다. 현감과 달리 찰방에게는 각 지방을 살펴 그 정보를 임금에게 직보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니 관리들은 찰방에게 잘 보여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들은 직급보다 보직이었으니, 유곡역은 보이지 않는 권력을 가진 역이기도 했다.
이처럼 문경은 길 때문에 현감과 향교 훈도 외에 유곡역 찰방과 조령산성 별장(別將)등 국가직 관리 2명이 더 상주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의 명장 곽재우가 유곡찰방을 역임했고, 옛 유곡역 자리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선정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유곡역을 중심으로 상인이나 선비 등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원(院)도 많이 설치돼 있었다.
원은 조선 초'중기 상업과 민간 교통 발달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장소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경지역에는 새재원(조령원), 요광원, 관음원, 관갑원, 회연원, 개경원, 불정원, 보통원, 동화원, 견탄원, 화봉원 등 무려 11개의 원이 있었다.
수많은 길손들이 유곡역과 문경새재를 통해 영남과 한양을 오가며 많은 이별과 만남의 정을 나눴다. 문경이 전국 최고의 길 중심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곡역도의 역사
유곡역은 고려시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역도체계에서도 으뜸역이 되었고, 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각지로 뻗은 9대간선 가운데 부산 동래(영남대로)와 통영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갈라졌다.
봉수제가 파발제로 바뀐 임진왜란 뒤에는 파발참(擺撥站)이 설치돼 이곳에서 중도참, 우도참, 좌도참의 세 갈래로 나가게 되는 요충지중의 요충지였다.
문광공 홍귀달(洪貴達'1438~1504)은 유곡역을 영남의 인후(咽喉'목구멍)라 표현했다. 그는 "모든 음식물이 넘어가는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처럼 유곡역은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곡역도가 언제 설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상 불분명하다. 1425년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는 유곡도가 보이지 않다가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유곡도가 기록돼 있어, 이 사이에 유곡도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유곡역도의 옛 자취는 사라졌지만 옛 지명들만큼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5개 마을이 그 안에 있다. 관아골(줄여서 이 마을에서는 지금 '앗골'이라 한다)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마을이 있다. 북쪽 마본, 서쪽 한절골(큰 절이 있었다 하여 한절골이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을 한적골이라 한다), 동쪽 새마, 남쪽 주막거리가 그것이다.
한절골은 아골마을의 남쪽에 있으며 역로를 기준으로 좌우로 주막거리와 시장(2'7일장)이 번성했으나, 지금은 식당과 슈퍼 등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남아있었다고 하는 역관과 아사(衙舍), 청고(廳庫)는 위치마저 확인하기 어렵게 됐다.
유곡은 워낙 골짜기라 도적이 많았으나 도적이 일단 마을로 들어오면 밖으로 탈출하지 못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유곡동에서 문경새재로 가는 고개에는 개서낭당(狗城隍堂) 전설이 전해진다.
이 마을 사람이 이웃 잔칫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길을 잃어 이 고개에서 실신한 것을 개가 깨워 집까지 가는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 뒤 개가 죽자 주인이 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개무덤을 만들어 줬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이 의리의 개를 서낭신으로 모시고 서낭당을 세웠다. 이 서낭신은 지난 1986년 불에 타고 현재는 서낭신위만 세워져 있다. 문경새재로 가는 고갯마루에는 유곡역도사적비가 1999년 1월 건립돼 역사의 현장을 재조명하고 있다.
◆현재의 유곡역도
앞서 유곡역을 만호(萬戶)지지(地址)로 표현한 바 있다. 지금도 그런 자부심이 대단한 마을이다. 노영구(78) 노인회장은 "이 마을에 최근까지 대성동사무소도 있었고, 학교와 농협과 새마을금고는 아직도 남아있다"며 "이 마을이 문경시 전체 농촌마을 중에 지금도 제일 큰 동네로 350호 1천여 명이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2년 유곡동을 가로질러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됐고 문경 상'하행선 휴게소가 이곳 유곡동에 자리 잡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그래도 유곡역도의 터는 영남사람들이 서울을 갔다오다 쉬는 쉼터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는 듯했다.
마을마다 당집을 짓고, 각기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했다고 하는데, 1970년 한날한시에 이 당집들은 함께 불에 살라졌다. 주민들에 따르면 누군가의 방화로 추정한다고 했다. 지금은 마본과 한적골에 그 흔적을 복원해 놓았으나, 시대가 변해 역의 역할이 쇠퇴하였듯이 당집의 역할도 쇠퇴했고 유곡마을도 가라앉았다.
현재의 시청 소재지인 점촌마을을 중심으로 중요한 동서남북 철길과 육로가 교차하면서, 어느덧 유곡마을은 한 선의 국도만 통과하는 마을이 되었고, 한낱 농촌마을이 되었다. 대신 점촌은 마을이 면이 되고, 면이 읍이 되고, 읍이 시가 되었다. 다 길이 만든 마을의 부침역사다. 만호지지가 어느덧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된 것이다. 이젠 그 한 가닥 3호선 국도마저 마을을 돌아나가 이 길조차 유곡동을 외면하는 길이 되었다.
점촌에서 3호선 국도를 따라 유곡마을에 이르는 길은 그 명칭부터 유곡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다. 공평마을이 먼저 나오는데, 그 마을의 이름은 구역(舊驛)에서 전이된 이름이다. 유곡에 역이 생기기 전 이곳 기록은 없으나 역이 있었다는 증표다. 구역-구녕-꿩 하다가 한자로 표기한다는 것이 공평(孔平)이 되었다. 정체도 없는 엉뚱한 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임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바로 유곡역 찰방을 지낸 임종수 선생의 후손 임씨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 마을이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임종수 찰방의 교지, 유곡역 관련 문서들을 보존하고 있어 당시의 유곡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역 문화의 새로운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4월 13일 도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됐으며 교지, 준호구, 점지, 시권 등의 고문서류(古文書類)와 삼등마안, 유곡역도중기책 등 각종 문서가 남아 있다.
역이 있던 곳은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던가? 유곡동 인근에는 문경을 지키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유곡을 둘러싸고 있는 산등성이가 이곳에서 보인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그 옛날 유명하던 문경시멘트 공장이 있던 신기공단 길이 나온다. 신기라는 이름도 아마 유곡의 신기(新基), 유곡의 새터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신기에는 시멘트 공장 터가 크게 남아 있고, 그 옛날 뒤집어썼던 흰 석회가루가 쇤 머리처럼 남아있다.
주민들은 사라진 유곡역도의 옛모습을 굉장히 아쉬워했다.
다행히도 문경시는 교통과 길의 고장 문경을 재조명하기 위해 이곳 유곡역사 복원사업에 착수해 다소 위안이 되고 있다.
엄원식 문경시청 학예사는 "수많은 역이 있었지만 1896년 역제도가 이 땅에서 사라진 100여 년 동안 역이 복원된 적은 없었다"면서 "문경이 전국 지자체 최초로 역 문화 복원작업에 착수해 정체성을 살려나가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유곡역도에 대한 찰방 및 역문화 복원을 위한 타당성 조사 용역작업이 올 12월 말에 완료될 예정이다.
◆유곡역도의 옛 영화를 말해주는 비석거리
유곡역도에는 많은 비석들이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점촌북초등학교 앞에 있는 이들 비석은 관직에 따라 관찰사, 찰방, 역리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관찰사의 비는 7기로 대체로 134㎝ 이상으로 비신이 높고, 찰방의 비는 6기로 대체로 90㎝이며, 역리들의 비는 2기로 79㎝이다. 관직 고하에 따라 비의 높이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찰사의 비는 대부분 불망비(不忘碑)로 역졸이나 역민의 고역을 덜어 주어 이를 잊지 않고자 하는 내용이다. 찰방비는 대부분 선정비로 되어 있다. 내용은 대체로 본역의 이민(吏民)을 폐단 없이 잘 다스렸다는 다소 추상적인 것이다. 관찰사비는 불망(不忘)의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하였지만 찰방비는 그렇지 못하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문수 비는 주막거리 남쪽(유곡동 189-55)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경·고도현기자 dory@msnet.co.kr 고성환 시민기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