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산촌 아이들의 놀이친구 '누렁 소' ⑦황무룡 시인의 울진 평해

경북 울진군 평해읍 오곡리가 고향인 황무룡 시인이 어린시절 추억을 회상하며 마을 입구 오곡지에서 소 먹이기를 하고 있다.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경북 울진군 평해읍 오곡리가 고향인 황무룡 시인이 어린시절 추억을 회상하며 마을 입구 오곡지에서 소 먹이기를 하고 있다.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황무룡 시인이 친구 손명영 씨를 만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황무룡 시인이 친구 손명영 씨를 만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황무룡 전 칠곡군 부군수
황무룡 전 칠곡군 부군수

울진군 평해읍 오곡리,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이름만 들어도 당장 달려가 뛰놀고 싶은 곳, 내 꿈과 삶, 문학의 모체인 그곳이 꿈엔들 잊지 못할 나의 고향이다. 앞뒤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 실개천인 오곡천이 흐르는 소통골짜기(소죽통 같이 생겼음)의 북쪽 기슭에 남쪽을 향해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고,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물총새가 살았던 오곡제(못)가 마을 역사와 함께해온 순수 농경취락 마을로서 세월과 버티고 있다.

옛날 집집마다 뜰 안과 마을에 오동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해서 오동나뭇골(梧谷) 또는 옷질(梧里)이라 불러졌는데 평해읍에서 2㎞쯤 북쪽의 백암산에서 뻗어 내린 끝 줄기 사이에 서쪽은 삼산봉이 산바람을 막아주고 동쪽은 일출봉이 동해의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산촌마을로 기후는 바람이 적고 온난하여 지금도 변함없이 60여 가구가 오순도순 정겹게 살고 있으며 아직도 술집은 물론 상점도 없고 하루 마을버스가 세 차례 운행되는 오지다.

직장 따라 40여 년을 떠돌았던 객지 생활보다는 어릴 때 뒹굴었던 20여 년의 고향살이가 더 정겹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평생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련한 추억들이 뼈 속 깊이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소와 얽힌 사연들이다. 집집마다 소가 재산목록 1호에다 논밭갈이, 달구지 끌기 등 농력의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만큼이나 가까운 동물이었고 놀이문화가 변변찮았던 시절이라 자연히 소와 함께 놀았던 기억들이 오래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참꽃(진달래), 살구꽃, 개나리 피는 봄에는 소에게 봄맛을 느끼게 해야 털갈이를 한다하여 소죽 끓일 때 넣을 갓 돋아난 풀을 캐려 둥우리와 호미를 들고 이 논둑 저 밭둑을 헤매다가 어느 정도 캤다 싶으면 빈 밭에 모여 캔 풀을 일정 부분 내놓고 먼 거리에서 호미를 던져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 모두 가져가는 풀 따먹기, 잃어도 그만 따도 그만이지만 잃으면 다시 캐고 따면 잃은 친구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풀이 좀 들 자란 봄에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보자기를 마루에 던져 놓고 소를 보리밭둑에 몰고 가 풀을 뜯어 먹이다 한 눈 판 사이 푸른 보리를 뜯어 먹게 해 밭주인으로부터 야단맞기도 했다. 풀이 완전히 자란 늦봄부터 추석 때까지는 모듬 소먹이기를 한다. 온 동네 소를 모아서 한꺼번에 이골저골 풀 많은 골짜기를 찾아 몰아 다니며 먹이는데 아침 해 뜰 때부터 7시 사이, 오후에는 점심 먹고부터 해질 때까지 하루 두 차례 앞골, 뒷골, 자장골, 녹진골, 시장골, 중창골, 삼산봉, 황골, 짓골 등등 5㎞쯤 떨어진 먼 평밭골까지도 소먹이는 무대였다.

외국의 대단위 목장에서 목동들의 소몰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한 집에 한 마리 아니면 두 마리를 먹이다 보니 집집마다 소먹이는 소임을 아이들이 맡았다. 외양간이나 마당가 두엄더미에 매어둔 소의 고삐를 풀거나 몰고 나와 목이나 뿔에 감아서 마을 공터에 모이면 소먹일 장소를 정하고 그곳으로 선발대가 네다섯 마리 몰아서 앞서면 그 뒤로 줄줄 따라 70여 마리를 골짜기에 몰아넣고는 소들이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하게 구역을 정하여 지켜야 하는데 나이 많은 대장이 솔잎 심지뽑기로 장등(산 위 능선), 계 바닥(산 아래 계곡), 양 옆바람(골 옆 능선) 네 곳의 책임구역을 정해주면 끼리끼리 책임구역에서 소를 지키면서 갖가지 놀이들을 즐겼다. 가위바위보 대장놀이, 말 타기, 공기놀이, 꽁 띄기, 시조낭송, 끝말잇기, 풀 모자 만들기, 동요 부르기, 가위바위보 아카시아 풀잎 따기 놀이 등등 정신없이 놀다가 해가 서산을 넘을 때 쯤 각자 지킨 방향에서 소를 몰아 한곳에 모아놓고는 집집의 소가 다 있는지 확인하고 올 때처럼 다시 소를 몰아 마을로 돌아갈 때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행렬 같았다. 어떤 때는 놀이에 몰두하다 소가 구역을 넘어 멀리 가버린 것도 모르고 그 소를 찾아 동네 사람들이 밤새도록 산 계곡을 헤매다가 새벽녘에 어느 무덤가에 누워 되새김질하는 소를 찾아 몰고 오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서너 마리가 골짜기를 빠져나가 남의 밭 콩이나 고구마 잎을 마구 뜯어먹고 짓밟아서 주인으로부터 종아리를 맞고 울기도 했다.

초목이 낙엽으로 변하는 늦가을에는 곡식을 다 걷어들인 빈 논 밭골에 아예 아침부터 종일 소를 풀어 두었다가 저녁에 몰아오기도 하고 겨울에는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 먹이는데 한겨울 얼음지치고, 팽이치기, 자치기를 하다 때가 끼고 얼어터진 손발을 소죽통에 앉아 뜨거운 소죽물에 불리어 빡빡 문질러 씻었던 추억들이 새롭다. 뿐만 아니라 모듬 소먹이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간식거리를 마련해 먹는 재미다. 하지에 캔 감자를 집에서 가져와 모닥불을 크게 피워 자기 감자를 자기가 찾아먹게 표시해 구워먹고, 밭주인 모르게 슬쩍슬쩍 고구마를 캐와 구워먹고, 콩서리, 밀서리로 입가를 시꺼멓게 검정 칠하기도 하고 또 참외, 오이, 가지서리 게걸스러운 친구는 떡개구리 뒷다리나 뱀의 껍질을 벗겨 구워먹기도 했다. 이런 모듬 소먹이기의 추억은 지금은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는 먼 상상 속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소에 대한 이미지도 예전 같지 않다. 옛날 소가 죽 먹고 자던 외양간도 없어졌고, 마당 어귀에 소를 매어두던 두엄더미는 시멘트 바닥으로 변했고, 소먹이로 다니며 뛰놀던 길과 골짜기는 숲으로 우거져 여긴가 저긴가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요즘 소는 축사에서 사료를 먹고 자라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 죽어서 식육점 고깃덩어리로 걸려서 팔려가는 상품으로 변해버렸고 광우병, 구제역, 브루셀라 등 가축 질병으로 농민들의 주름살만 늘리는 천덕꾸러기로 바뀌었으니 정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손 씨 몇 집을 제외하고는 평해황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나의 살던 고향 '오곡리'의 그 정겨움을 시로 쓴 적이 있다.

오동나무/ 전설어린/ 오곡리

이른 봄/ 산꿩 울음에/ 참꽃 붉게 번지는/ 동심

수호신 지켜선/ 못가에/ 물총새 나르고

수채화로 번지는/ 꿈속/ 아련한 마을 - 오곡리 전문 -

이 시가 수록된 나의 처녀 시집의 제목이 '수채화로 번지는 꿈속'이었는데 수채화로 번지는 꿈속이 바로 마을 입구에 있는 오곡못이다.

길이 100m에 물 깊이 2m, 못 둘레가 300m로 입구는 둑으로 남쪽은 산이고 북쪽은 버스가 다니는 길 둑,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못가에는 아름드리 노송들로 둘러싸여 어릴 때만 해도 백두루미, 황새, 오리, 기러기, 물총새 등이 철따라 서식했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선생께서 인근 황보리에서 5년간 귀양살이 하면서 즐겨 찾은 것을 비롯하여 시인, 묵객, 낚시꾼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5월 단오에는 못가에 푸른 창포꽃이 피고 노송가지에 그네를 매어 그네뛰기도 하고, 여름에는 말바우(마름)줄이 온 못을 뒤덮어 열매를 따 까서 먹기도 하고 말바우줄 사이로 낚시를 즐기기도 했으며, 또 어느 여름에는 가뭄이 심해 못물이 바닥을 드러내자 온 동네 사람들이 못에 들어가 진흙탕 속에서 가물치, 뱀장어, 붕어, 마조개피(민물조개)를 건져내느라 정신없을 때도 있었고, 사시사철 밤에는 마을 처녀총각들의 추렴이나 데이트장소로, 한겨울에는 썰매나 스케이트장으로 활용되었던 정겨운 모습들은 물속으로 잠겨버렸는지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변하기 시작했다. 시멘트로 만든 둑길에 아름드리 노송은 한 그루 두 그루 말라 죽어가고 못 가운데 섬에는 아담한 정자를 지어놓아 제법 운치는 있어 보이나 산 쪽으로 난 출입다리가 한강철교같이 놓여 있어 그것이 오히려 흉물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울진은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손이 닫지 않는 등 위 어깨죽지 부위에 해당되어 아직도 교통이 불편하고 멀다. 그래서 고향을 가려면 큰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래도 가끔 고향을 찾을 때는 못 둑에 차를 세워놓고 내려 못가를 둘려보면서 어릴 때 소중한 추억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보기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앞에서 자신을 향해 "과연 고향은 나에게 어떤 곳인가?"하고 새삼 물어본다. 그럴 때 잔잔한 수면 위로 물방개 한 마리가 쏙 올라왔다 내려가는 모습이 그 해답을 주는 것 같아서 쓸쓸하기만 했다.

(전 칠곡군 부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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