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기나긴 일제탄압에서 벗어난나 드디어 맞은 광복. 그로부터 66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일제의 악몽을 곱씹고 힘들어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해방을 맞지 못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6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끔찍하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로 묻힐 일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문제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66주년 광복절을 앞둔 13일 오후 대구 동신교 아래 신천 둔치. 빗줄기를 맞으며 모인 시민들이 풍선을 들고 노란 물결을 만들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 엄마 손을 잡고 있는 어린 아이와 외국인 강사 등 너나 할것 없이 노란 풍선을 들었다. 나이와 겉모습은 달라도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하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보듬기 위해서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이 개최한'2011 평화와 인권을 위한 대구시민 걷기대회'에 1천500여명의 대구시민이 참여했다. 이 행사는 대구에 거주하는 3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대구시민의 특별한 만남을 위해 마련됐다.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내리는 비를 맞으며 동신교에서 희망교까지 왕복 6㎞를 걸었다.
나라를 되찾은 지 66년이 됐다 해도 할머니들 가슴 속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할머니"를 부르며 품에 안기자 휠체어를 탄 이선옥(88)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고생들의 입에 김밥을 하나씩 넣어주던 이 할머니는 "열일곱 살 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 나도 저렇게 철 없을 때가 있었는데"라며 가슴을 쳤다. 이 할머니는 16살 때 경북 경주시 안강읍 한 빨래터에서 정체 모를 트럭에 강제로 태워졌다. 그는 그 트럭이 대만의 위안소로 보낼 여자들을 실은 트럭인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한많은 세월을 보낸 뒤 해방이 돼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고통은 여전했다. "빼앗긴 내 청춘이 너무 아깝고 옛날 일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 이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김분이(85)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걸음을 내딛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괴롭히고 있다. 김 할머니는 17살 때 "외국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동네 사람 말에 속아 대만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조선 여자들을 성노리개로 취급하는 일본군을 마주할 때마다 나라 잃은 설움이 뼛속까지 사무쳤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아직도 일본 군인들을 생각하면 갈아서 마시고 싶을 정도로 미울 때가 많아. 이런 우리를 이해해주고 시민들도 힘을 보태주니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광복절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위안부 문제는 제자리 걸음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다. 15살 때 대만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한 이용수(83) 할머니는 지난달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를 찾았다. 일본의'전시성폭력문제연락협의회'가 주최하는 피해자 증언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할머니는 "일본이 나쁜 짓을 해놓고 지금까지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우리가 나중에 이 땅에서 사라지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전국에 생존 중인 위안부 피해자는 총 70명으로 이중 5명이 대구에 살고 있다. 모두 팔순을 넘긴 이들은 일본 정부의 극적인 태도변화가 없다면 한을 풀지 못한채 우리 곁을 떠나야 할 상황이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인 이인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은 "할머니들의 삶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살아있는 역사'다.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할머니들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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