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식후에 이별하다

# 식후에 이별하다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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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가 돌아서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시간은 또 다른 그대에게 달아나는 시간을 주는 걸까요? 혹은 열까지 세는 시간이란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시간, 헤어지기 전 마지막 밥을 먹이는 시간일까요?

돌아보면 안 되니 어서 맘의 준비를 하라. 나 이제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으니 그대는 돌아서 가라. 내가 그대 심장에 겨눈 총알을 순순히 받아 안던 그대는 천성이 너무 순하여 독한 죽을 휘젓듯 내가 아프다. 뭐 이런 건가요?

그러나 착한 그대여, 무책임하게 사랑이란 그런 거라니, 재미가 없다느니라는 말, 그거 사실 내가 못나 보낸다는 다른 말이죠. 굳이 식후에 이별한다는 제목을 보세요. 그러니 이제 편히 가요. 열까지 셀 동안, 나는 어둠 쪽으로 갈 테니 그대는 환함 쪽으로 가요. 어서 가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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