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한 귀퉁이에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작은 글귀가 새겨진 것을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표사원이라는 직책을 다시 보고는 혹시 노조위원장이냐고 묻는다. 직원들이나 대표가 한 가족이기 때문에 회사는 언제나 공동운명체라고 생각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지만 가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에는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그게 가능하던가요"라는 질문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조롱어린 웃음을 짓는 데는 할 말을 잃는다.
얼마 전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대기업의 회장들을 보면서 한 친구는 "군사독재 시절이 좋았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그가 진실로 그 시절을 그리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식의 분노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눈치를 보며 몸을 떨던 대기업의 회장들은 이제는 스스로 권력이 되었다. 마지못해 청문회장에 나왔지만 우리가 없으면 너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안하무인의 태도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어떻게 회장이라는 사람이 한진중공업에서 죽어간 김주익, 곽재규를 모를 수 있습니까." 200일이 넘게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피맺힌 절규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가진 자들만을 수혜자로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보다 우선인 것이 돈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고 열심히 배우고 철석같이 믿어왔던 명언은 그야말로 듣기 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진정 우리가 가진 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가지기 위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핍박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다. 하지만 80년대라는 절망의 낭하를 빠져나올 때 우리가 가진 것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뿐이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친구는 학생운동 시절 수배 생활 중에도 한겨울 길에 쓰러져 있는 만취한 사람을 업고 파출소로 향했다. 체포를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그는 "사람에 대한 예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는 먹고사는 것에 영혼을 팔았노라고 부끄러워하지만 그의 분노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슬픈 눈빛으로 나가버린 뒤에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끄라소프(Nikolay Alexeyevich Nekrasov), 러시아 작가의 말이 다가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태흥(미래티엔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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