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은 산으로 둘러싸인 동부지역(의성읍'단촌면'점곡면'옥산면'사곡면'금성면'가음면'춘산면'봉양면'안평면'신평면)과 넓은 평야가 있는 서부지역(안계면'다인면'단밀면'단북면'비안면'구천면'안사면)으로 구분해 불리고 있다. 동부지역의 경우 산악지형인 탓에 고갯길이 유난히 많다. 특히 사곡면 경우 7개의 고갯길이 있었다. 안평의 윗재, 단촌의 지랫재, 점곡의 한티재 등은 40, 50년 전 의성읍 5일장이 서는 2일과 7일이면 산골 주민들의 등짐과 지게, 수레(소달구지) 행렬이 고갯길을 가득 메우곤 했다.
또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 무렵 업무용 차량이 귀할 때 의성군청의 공무원들이 사곡과 옥산, 점곡, 안평 등지에 주요 업무가 있을 때는 주로 자전거를 이용, 1박2일 출장으로 업무를 보기도 했었다. 요즘에는 자동차로 한 시간 이내 거리여서 반나절 출장이면 가능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출장길은 고생길 그 자체였다.
◆사곡면의 고갯길
사곡에는 문고개를 비롯해 사곡재, 장티재, 미시재, 흙고갯재, 무덤이재, 주월재 등 7개의 고갯길이 있다. 지금은 아스콘과 콘크리트로 모두 포장이 됐지만, 40, 50년 전에는 죄다 오솔길 수준이었을 터. 의성읍을 왕래하던 사곡과 옥산, 춘산면 주민들과 청송 현서면 주민들 대부분은 마늘과 사과, 고추, 약초, 싸리나무로 만든 공예품인 소쿠리와 광주리 등을 등짐이나 지게, 소달구지에 싣고 부푼 마음에 힘든 줄도 모르고 사곡면의 크고 작은 재를 넘었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길엔 문고갯재 아래(지금의 사곡면 신감삼거리) 주막에서 같은 마을 주민들이나 시장 상인(장돌뱅이), 소장수 일행끼리 모여 그날 있었던 일들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돌아올 의성읍 5일장을 기약했다. 또 사곡면의 크고 작은 재는 사곡과 옥산'춘산 출신으로 안동, 의성에서 유학을 하는 중'고교 학생들이 주말이면 집으로 가기 위해 이용하던 고갯길이기도 했다. 사곡에는 특히 꽃이 유명하다. 사곡에는 5년 전만 해도 매년 '작약꽃 축제'가 열렸으나 중국산 작약이 국내에 수입, 대량 유통되면서 국내산 작약값이 폭락함에 따라 이제는 작약 재배 면적이 크게 줄어 들었고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고 있는 형편이다. 이후 사곡에는 작약꽃 축제가 끊긴 대신 화전리 일대에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는 산수유를 배경으로 '산수유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산수유는 봄에는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가을에는 빨간 열매를 맺는 한약재다. 매년 3, 4월에 열리는 산수유꽃 축제에는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온다. 국제연날리기대회와 함께 의성의 대표적인 축제로 꼽히고 있다.
▷사곡재=사곡재는 의성 사곡면과 청송 현서면(화목)을 잇는 주요한 고갯길로, 지방도 912호선이다. 이 길을 통해 사곡면 주민들 특히 공정리 주민들은 화목 5일장을 이용했으며, 화목 주민들도 사곡장(지금은 폐쇄)과 의성읍 5일장을 왕래하며 장작과 참깨, 고추, 마늘 등을 시장에 내다 팔고, 생선과 생필품 등을 구입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곡재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해가 진 이후에는 인적이 끊긴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사곡면 주민들은 이 재를 통해 화목의 목욕탕과 5일장을 이용하고 있고, 화목 주민들 또한 이 재를 넘어 의성읍 5일장을 왕래하고 있다. 화목 사람들은 지금도 이 재를 화목재로 부르고 있다. 사곡재와 사곡면 일대는 2000년대 들면서 적잖은 변화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사곡면 공정1리 일대가 사곡댐 공사로 인해 마을 일부가 수몰되면서 우회도로가 개설됐다. 1980년대 후반 사곡재가 왕복 2차로로 확장'포장되면서 경북 내륙과 포항 등 동해안을 잇는 주요 도로로 이용되는 등 교통의 요충지로 변하고 있다.
▷장티재, 주월재=장티재는 옥산면 실업1'2리, 주월재는 실업3리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다. 옥산면 주민 대부분은 지방도 914호선인 점곡과 한티재를 넘어 의성읍 5일장을 이용했으나, 실업1'2'3리 주민들은 한티재 쪽으로는 길도 험하고 시간도 더 걸려 지름길인 장티재와 주월재를 통해 사곡면 신감삼거리를 지나 의성읍으로 왕래를 했다. 실업1'2'3리는 1960년대 전후만 해도 오전 6시를 전후해 고추와 약초, 광주리와 소쿠리 종류(싸리나무로 만든 공예품) 등을 등짐이나 지게를 지고 3, 4시간을 걸어 의성읍 5일장에 내다 팔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곧장 생선과 생필품 등을 구입해 되돌아오곤 했다. 당시 옥산면 실업1'2'3리 주민들의 생활은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사과 농사 등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의성에서도 알아주는 부촌으로 변했다.
▷미시재, 무덤이재=미시재는 춘산면 사미리 지역 주민들이 의성읍 5일장을 왕래하던 주 통로로 이용했으며, 사미리 주민들은 이 재를 통해 금성면으로 왕래하기도 했다.
무덤이재는 춘산면 효선리 주변 주민들이 의성읍 5일장을 가기 위해 이용하는 주 통로로 이용됐다. 미시재와 무덤이재는 현재 통행이 없어 숲이 우거진 채 옛 고갯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흙고갯재=흙고갯재는 사곡면 토현, 작승, 화전, 신리리 주민들이 금성면 5일장을 왕래하던 주 통로였고, 금성면 만천리와 운곡리 등 금성산 기슭 주변 주민들이 의성 5일장을 왕래할 때 이 고갯길을 이용했다.
▷문고갯재=문고갯재는 사곡을 통해 의성 5일장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필히 넘어야 할 고갯길이었다. 사곡 주민들은 의성읍 5일장에 이 고갯길을 넘어다녔고, 장티재와 주월재를 넘은 옥산면 실업1'2'3리 주민은 물론 사곡재를 넘은 청송 화목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고갯길이었다. 문고갯재를 오르기 전 신감삼거리에는 주막과 함께 한복을 입은 아낙들이 있는 술집도 5∼7개가 옹기종기 붙어 있어 문고갯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쉬어가는 쉼터가 되기도 했다. 또 사곡에서 문고갯길을 넘어 의성읍에 이르기 직전 점곡면 황용리로 가는 조그만 재가 있다. 이 재는 점곡면과 옥산면 주민들이 의성 5일장을 가기 위해 한티재보다 지름길인 이 재를 이용하다가 강도를 만나 돈과 생필품을 빼앗기는 일이 종종 발생해 '도둑골'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도 했다.
▷재랫재=조선시대 한양에서 영남지방을 내려오기 위해서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첫 번째 길은 한양에서 충주, 문경, 상주, 선산, 대구, 밀양, 동래로 통하는 영남대로가 있고, 두 번째 길은 한양에서 봉화삼로로 통하는 양주, 광주, 여주, 충주와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서 경상좌도의 도시들인 풍기, 영주, 안동, 의성, 의흥, 신녕, 영천, 경주, 울산, 기장, 동래로 연결되는 영남좌로이다. 영남좌로를 이용할 경우 필히 거쳐야 하는 곳이 의성읍과 단촌면 경계지점인 재랫재다. 이 재는 조선시대에도 영남좌로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지만, 지금도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구와 안동을 잇는 5번 국도(왕복 4차로)가 지나가고, 현재 공사 중인 상주∼영덕을 잇는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인근에 '북의성 나들목'이 자리잡는 등 교통 요충지로서의 옛 명성을 그대로 이어갈 참이다. 당시 단촌면에서 의성읍으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재랫재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의성읍이다. 이때 의성읍 철파리까지는 자전거 페달을 밝지 않아도 도착하곤 했다. 이와는 반대로 과거에는 재렛재를 올라갈 때면 자전거를 타기보다는 끌고 갔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윗재=의성읍과 안평면 사이에 있는 윗재는 지방도 912호선으로 안평 주민들이 의성읍을 왕래할 때 이용하던 재다. 안평 사람들이 의성읍 5일장에는 특산물인 마늘과 고추, 참깨, 콩 등을 등짐이나 지게를 지고 이 재를 넘어다녔다. 또 장작이나 말린 솔잎(경상도 말로 소깝)을 지게 또는 소달구지에 싣고 의성읍 5일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안평 주민들은 의성읍 5일장이나 도리원(봉양) 5일장을 주로 이용했고, 신평 주민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신평 주민들은 안평에서 신평 사이에 있는 또 다른 재를 하나 넘어야 의성읍 5일장이나 도리원 5일장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한티재='한티재' 라는 지명은 의성 외에도 팔공산에도 한티재가 있고, 안동 한티재 등 경상북도에서 가장 많은 지명을 가진 재 중 하나이다.
의성군의 한티재는 지방도 914호선 의성읍 중리리에 있는 재로, 점곡면 주민들과 옥산면 구성리, 안동시 길안면 일부의 주민들이 의성읍 5일장에 갈 때 필히 넘어야 할 재가 한티재이다. 한티재는 의성읍 쪽으로 깊고 긴 계곡이 있고, 한티재 산기슭으로는 비포장길이 있었다. 당시 이 재를 이용하던 사람들 중 소달구지에 농산물과 장작 등을 실은 사람들은 한티재 정상에서 비포장길을, 등짐이나 지게를 진 사람들은 한티재 정상에서 계곡을 통해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이용했다. 이 재는 구미와 군위 등 경북 내륙지역의 주민들이 청송이나 영양, 동해안 등지를 여행할 때 이용하는 주 통로로 이용되는 등 최근 들어 이용객들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특히 주말이나 가을 단풍철에는 청송 주왕산을 이용하는 관광객들로 교통량이 크게 증가하기도 한다.
◆의성읍 5일장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만 해도 의성읍의 인구는 4만5천 명 정도였다. 당시의 읍 치고는 의성읍 인구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여기에 문고갯재를 넘어온 사곡, 춘산면, 옥산 실업리 주민들과 청송 현서면 주민들, 윗재를 넘어온 안평과 신평면 주민, 한티재를 넘어온 단촌면 주민, 한티재를 넘어온 점곡, 옥산면 주민, 그리고 금성, 가음면 주민들을 합하면 의성읍 5일장이 서는 2일과 7일에는 넘치는 인파로 그야말로 의성읍이 인산인해였다는 표현이 더 맞을 터. 특히 의성을 대표하는 특산품인 마늘시장과 고추시장, 우시장 등지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으로 현금과 귀중품 도난사고도 적잖아 곳곳에 경찰(형사)들이 길목을 지키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당시 의성읍 5일장에는 사곡, 춘산면 주민들이 마늘과 고추, 약초, 장작 등을, 단촌, 안평 주민들 역시 마늘과 고추, 참깨, 콩 등을, 점곡, 옥산면 주민들은 싸리나무로 만든 소쿠리와 광주리, 장작나무들을 내다 팔았다. 지금도 의성읍 약초골목 상인 중 사곡면 출신들이 많아 사곡이 약초의 주산지임을 대변해주고 있고, 사곡마늘은 의성마늘 중에서도 최고로 인정해준다. 의성군에서 최대 고추 주산지인 단촌 5일장인 5일과 10일에는 전국에서 고추 상인들이 몰려드는 탓에 새벽에 거래가 이루어지며, 오전 10시가 되면 모든 거래는 끝난다.
글 사진 의성'이희대기자 hd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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