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간질 장애 앓으며 어린 딸에 의지 김경민 씨

딸 친구들 앞에서 발작,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간질 증세로 고통받고 있는 김경민(가명·37) 씨에게 자신의 병보다 더 큰 고통은 가난과 병의 대물림이다. 김태형기자thkim21@msnet.co.kr
간질 증세로 고통받고 있는 김경민(가명·37) 씨에게 자신의 병보다 더 큰 고통은 가난과 병의 대물림이다. 김태형기자thkim21@msnet.co.kr

"엄마가 미안해."

김경민(가명·37) 씨는 두 자녀를 생각하면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입밖에 나온다. 엄마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오히려 자식에게 의지하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다. 김 씨는 간질 장애를 안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발작을 일으킬지 알 수 없어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산다. 큰딸 현서(가명·15)와 길을 가다 갑자기 쓰러진 적도 수차례. 김 씨는 "좋은 것만 해줘도 모자라는데 엄마가 애들한테 짐이 된 것 같다"며 고개를 숙였다.

◆"외출이 두려워요"

김 씨는 혼자 외출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혼자 바깥에 나갔다가 발작 때문에 쓰러질까봐 두려워서다. 4년 전엔 빨래를 널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엉덩이뼈와 오른쪽 다리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오른쪽 다리를 전다.

김 씨는 현서와 함께 시장에 가다가 길바닥에 갑자기 쓰러진 적도 있었다. 딸 친구들 앞에서 발작을 일으켰을 땐 죄책감마저 들었다."그땐 몸이 괜찮았는데, 현서랑 있을 때 발작을 하면 나중에 딸 얼굴을 제대로 못 쳐다보겠어요." 이제 현서는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엄마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데려온다.

김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경기를 일으켰다. 김 씨의 어머니는 "몸이 허해서 그런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결국 치료 시기를 놓쳤고, 발작은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스무 살 때 우산 만드는 공장에 취업했던 김 씨는 일을 하다가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다음날 그는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간질 증세가 있는 직원을 반길 고용주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병이 장애라는 사실을 2005년이 돼서야 알게 됐다. 김 씨는 간질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남편의 죽음

건설 현장 근로자로 일하던 남편은 '술꾼'이었다. 두 아이를 아픈 아내에게 맡기고 매일 술을 마셨다. 김 씨는 남편에 대한 원망을 속으로만 삭였다. "내 몸도 성치 않은데 내가 누굴 미워하겠어요. 그저 아이들을 위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했죠." 알코올중독 전문치료 병원을 들락거리던 남편은 김 씨의 바람조차 외면한 채 3년 전 세상을 등졌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둘째아들 현준이(14)가 상주가 됐다. 남편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3일장을 치르는 동안 문상객이 50명도 채 오지 않았다. 조의금으로 장례식장 비용을 대니 수중에 남는 돈도 없었다. 문제는 집이었다. 당시 김 씨가 살던 철로변 판잣집은 제대로 된 자물쇠조차 없었다. 도둑이 들어와 쌀을 훔쳐 가기도 했다. 더욱 큰 걱정은 딸이었다."요즘은 세상이 험해서 나쁜 사람들이 많잖아요. 혹시라도 남자 어른이 없는 집에 사람이 찾아와 험한 꼴 당하면 어쩌나 항상 걱정했죠."다행히 지난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7만원짜리 원룸을 구했다. 좁은 방에서 세 식구가 몸을 바투 붙이고 자는 것이 불편해도 2년 전에 비하면 궁궐이나 다름없다.

◆간질보다 무서운 가난

김 씨는 자신의 병은 무덤까지 지고 갈 짐이라 여기며 체념했다. 하지만 제발 아이들만은 고통을 겪지 않길 간절히 기도했다. 지난해 3월 현준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어릴 때부터 "가슴이 아프다"며 칭얼거리던 아들을 "괜찮아질 것"이라고 다독이던 자신과 김 씨의 병이 별일 아니라던 어머니의 모습이 겹쳤다. 진단 결과는 심장에 혈액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심장 판막증'이었다. 수술비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김 씨는 한 복지재단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결했다."차라리 내가 아파야지, 내 아들까지 아프면 어쩌란 말인지." 김 씨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큰딸이다. 빨래도, 청소도,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현서가 도맡아 하고 있다. 듬직한 현서가 한 번씩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할 때면 김 씨의 가슴은 미어진다. 생계급여 75만원으로 한 달 20만원이 넘는 학원비를 감당하기란 역부족이다. 김 씨는 자녀가 자신의 질병도, 가난도 물려받지 않았으면 한다."엄마가 애들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이것까지 물려줄 순 없잖아요."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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