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닥터 최중근의 세상 내시경] 정신적 고문, 기수열외

최근 강화도 해병 2사단에 총기사고가 벌어졌다. 지난해 연평도 사태 이후 용맹스런 해병대 위상에 전 국민적 갈채가 쏟아졌고 배우 현빈을 비롯해 해병대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4.5대 1이라는 대학입시보다 치열한 지원경쟁률을 기록하면서 일종의 해병대 신드롬도 낳았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가해자인 김 상병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배경에 '기수열외'라는 해병대만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사건을 접하고 영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을 떠올린 이들이 많았다. 영화는 쿠바 한 미군기지의 해병대원 산티아고 일병이 구타로 사망하는 사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경에 해병대 내부에 일명 '코드 레드'(Code Red)로 불리는 얼차려와 구타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그 과정이 이번 사건과 어딘가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수열외'는 '코드 레드'보다 한층 더 심각하다는 것이 문제다. 육체적 가혹행위보다 더 잔인한 정신적 고문이기 때문이다. 해병대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기수열외는 한 사람을 투명인간화해서 마치 없는 것처럼 왕따 시키는 악습이다. 여기에 최근 해병대의 인권실태를 조사한 국방부 감사 자료는 적잖이 충격적이다. 선임 기수를 못 외우고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폭행당한 피해자가 고통을 호소하자 선임병들을 모두 소집해 축구하다 다친 걸로 은폐를 공모하고 이를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대대장은 단순 폭행사고로 인식해서 처리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하는 병사와 상급자들은 보이지 않게 서로를 감시하고, 때로는 서로를 격려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가장 최악의 경우가 은폐에 가담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폭행당해 입원해 있는 병사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는 식의 축소'은폐를 강요하는 사례도 있었다. 지금 해병 2사단은 최근 서북도서사령부를 창설하고 나서 북한이 전면보복, 전면타격을 공언하면서 긴장이 높아진 지역이다. 높은 수준의 전투준비 태세가 요구되는 부대다 보니까 그 스트레스가 가중됐을 뿐 아니라 막중한 전투임무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사고 예방에 관한 지휘관들의 관심이 소홀해 진 영향도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수습하고 이를 계기로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오로지 범행을 저지른 김 상병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조직의 문제 또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결과적으로 규범보다는 자율에 익숙한 신세대 장병들의 의식구조에 적합한 군대 내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다른 군과 차별성을 도모하려는 해병대 특유의 왜곡되고 굴절된 조직문화가 복합적으로 빚어낸 불행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가슴이 누구보다 철렁 내려앉은 것은 군대에 아들을 보냈거나 또 앞으로 군대를 갈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들일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악습을 철저히 규명하고 확실한 제도적 대비책을 마련해 타산지석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해병대의 충실한 감시자와 격려자가 될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해병대원 자신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구미 탑정형외과연합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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