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1 … 이사하던 날
"아니, 이런 것도 들고 왔수? 좀 버려요, 엄마. 쌓아놔 봐야 결국엔 다 버릴걸 뭐 하러 쟁여놔. 그때그때 버리고 필요하면 또 새것 사서 쓰고, 그게 살림하는 재미지. 그렇다고 그게 억만금이 들어가는 일이유? 아니 내 말은 낭비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제 새집에 들어가는데 헌 물건 좀 버리고 살라는 거지. 아이고 나 중학교 때 쓰던 물건들도 여직 있네."
한 번 시작된 나의 잔소리는 이삿짐이 다 풀릴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엄마도 그리 듣기 싫은 눈치는 아니어서 내 잔소리도 끝나지 않는다. 내 기억으론 지금까지 우리 집은 대략 6, 7번의 이삿짐을 쌌었다. 부모님의 하루도 쉼 없는 근면성실로 적은 평수에서 좀 더 큰 평수로 적은 금액의 전세에서 좀 더 큰 금액의 전세로 그렇게 근근이 살림을 불려갔지만, 그 중에도 새집은 없었다. 남의 집이어도 새집은 없었고, 내 집이어도 새집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이사는 그간의 이사와는 의미가 달랐다. 내 집이면서 새집으로의 이사이기 때문이다. 엄마 나이 육십에 처음 가져 보는 새집. 스물여섯에 아버지에게 시집 와 지금껏 어떻게 내 집이란 것은 겨우 마련해 보았어도 새집 살림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엄마였다. 딸 둘을 시집보내면서 작지만 새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내는 걸 보고 연방 좋다고 말할 땐, 그저 밥이나 해 먹으려나 걱정했던 딸들의 깔끔한 살림 솜씨가 기특해서 그리고 그 옛날 당신보다는 시작이 좀 더 수월해 보여 앞날의 고생이 덜할 것이란 안도감에서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어디 그것뿐이었을까. 자식을 키우고 손바닥 손금 보듯 빤한 남편 월급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며, 살림이라는 걸 살아내는 여자에게 집이란 그것도 새집이란 부유함의 척도를 넘어 얼마나 큰 인생의 보상이며 또한 선물인가. 어느 여자에게고 새집에 들어가는 날은 처음 시집가는 날만 같으리라.
육십 평생을 여자가 아닌 아내와 엄마와 며느리의 일만을 여일하게 해 온 엄마. "내 환갑 진갑 다 지나고 느이 엄마 육십에 이제 처음 새집이다. 남자인 나도 좋은데, 느이 엄마는 오죽하겠냐. 내가 말은 안 했어도 느이 엄마한테 미안한 게 많은 사람 아니냐. 이제 마음의 짐을 좀 던 기분이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그간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차마 흘리지 못한 눈물처럼 배어 있었다. 마누라 고생시킨 남편의 애달픈 마음, 새살림 살뜰히 차려놓고 살고 싶었던 여자로서의 엄마의 맺힌 마음이 이번 이사로 조금은 풀어졌을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청소거리 속에서 나의 온갖 타박도 지청구도 다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엄마에게 오늘은 새집으로 이사한 날이다.
권지현(경산시 옥곡동)
♥수필2… 신발 세 켤레
분홍색 물놀이 신발 세 켤레가 현관 중앙에 있었다. 방금 돌아온 신발은 피서지에서 묻어 온 마른솔잎이 신발 오른쪽 꽃무늬 장식에 꽂혀 있었다. 삐딱하게 벗어둔 딸아이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서 외부에서 들어올 때의 불쾌감을 덜기 위해 정리하고는 놀이에 지친 아이들을 재우고 있었다. 물놀이 재미도 재미지만 집 떠나 있었던 동안의 그 피로감으로 이내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아이들이 잠자는 동안 바람 빠진 튜브를 말리고, 젖은 옷을 세탁해서 널고 남은 식료품을 정리하고 있자니 외출했던 남편이 돌아왔다.
"밥 도. 배고프다. 아(아이)는?"
"방금 잠들었어요."
"와- 벌써 재우노? 나랑 좀 놀다 자게 하지…."
남편의 하루 피로를 풀어 주는 열쇠는 아이들의 재롱과 가족이란 울타리다.
언젠가 시어른께서 오늘과 마찬가지로 현관문을 들어서며 여자 신발 세 켤레만 나란히 있는 것을 보시고 "새 아가, 터 팔 때 안 되었나?" 하신 적이 있었다. 남편이 맏종손이라 더욱 그런 기대를 하시리라 이해는 되지만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미소로 대신했다. 과일을 씻어 쟁반에 담아 거실로 왔더니 두 딸아이가 할아버지 무릎에 착 달라붙어 앉아서 '할아버지 과일 드세요' 하며 포크로 찍어 드리고, 어린이집에서 배웠던 율동을 선보이자 금세 집안 대 잇기에 대한 걱정을 잊어버리시고, 즐겁게 한나절을 보내고 본가로 돌아가셨다.
그날, 밤이 늦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거실 등을 켜고 앉으니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에서 자라고 있는 벤저민 나뭇가지를 잘라 수북한 꽃송이 틈 속에 꽂았더니, 꽃병에 있던 꽃송이가 더욱더 화려해 보이는 것이다. 꽃만 있으니 예뻐 보이지 않더니만….
낮에 조심스레 하신 아버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분홍신발 세 켤레 옆에 남편의 구두를 놓아두었다. 분홍 옆에 검정 구두, 꽃병의 초록 줄기가 있어 돋보이는 꽃처럼 분홍이 더 분홍답게 예뻐 보였다. 그 까닭은 꽃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리라.
최윤서(대구 서구 내당1동)
♥시1… 능소화
접어야지
접고 또 접어야지
보름달 맑은 빛으로
익어버린 마음
아무도 못 보게
온갖 세월을 사랑의 깃털 속에 살아온 그대에게
사랑이란 말은
뜬구름.
부칠 수 없는 사연을
쓰고 또 쓰다가
끝내는 살라 버리는 아픔으로
푸른 뜻 한 조각 달고
활짝 피어
온몸으로 하직을 고하다.
민창기(영천시 대창면 병암리)
♥시2… 벌초하러 가는 길
벼슬이 높다 하여 갈 곳을 아니 가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말 못하고 가는 길
고운 님 마지못하여 초연하게 가신 길
산자락 들머리에 나지막한 봉분 하나
살아생전 소박했던 그 모습 그대로
한평생 외로워하니 이곳 또한 적막강산
잔디머리 깎아주고 칡넝쿨 걷어주며
이러구러 지난 세월 스무 해가 흘렀네
나직이 불러봅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김병욱(대구 북구 태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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