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들의 심금을 울렸고, 지금도 간간이 TV속에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연출하고 마이클 J 폭스, 크리스토퍼 로이드가 주연한 영화, 백 투더 퓨처(BACK TO THE FUTURE)가 그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여러 사건들을 전개해나가는 주인공들의 모험을 그린 영화이다.
그 영화가 그렇게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과거(過去)로의 회귀(回歸)'에 대한 '신기루 열망'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뜻으로, 곧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 '고향'(故鄕)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봐도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한 안식을 가져다준다. 어린 나이에 고향 하양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할 때, 나는 정말 지독한 향수병에 걸려 참 많이도 눈물을 흘리곤 했었는데, 눈만 뜨면 와촌 들판이요, 금호강변이었다.
경산시 하양읍 동서1리. 그곳이 내가 태어나고 박꽃 같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금은 많은 대학들이 들어서 있고, 읍내의 시가지도 상업위주의 상권에 묻혀 여느 도시 못지않은 인파로 득실대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냥 조용한 면소재지에 불과했고, 소재지에서 100m만 벗어나도 푸르른 와촌 들판과 은빛 물결이 넘실대는 금호강이 휘돌아나가고 있는 전형적인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다. 봄이 오면 그래도 진달래도 피고, 동서리와 금락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조산천(방천)에는 피라미도 참 많았다. 그 맑은 물에 겨우내 묵혀뒀던 빨랫감을 들고 나와 방천의 양쪽 편에는 빨래하는 아낙들의 방망이 소리와 검정 고무신을 벗어 든 우리 꼬맹이들의 물고기 사냥에 하루해가 저물곤 했다.
겨울의 무겁고 칙칙했던 옷을 벗어버리고 산모퉁이에, 들판에 파릇파릇한 잎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하늘을 향해 오를 때면, 우리 어린 녀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미루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는 도로로 향했다. 금호 가는 도로의 양쪽 편에는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미루나무가 연갈색의 여린 잎들을 내밀고 줄줄이 서있고, 와촌 들판에는 겨우내 용케도 버텨냈던 보리들이 푸르름을 더하고 있었다. 미루나무의 가지를 꺾어다 '호때기'(버들피리를 이렇게 불렀다)도 만들어 불고, 그것도 싫증이 나면 이제 한창 파릇파릇한 보리밭 사이로 노고지리 둥지를 찾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노고지리란 놈은 하늘 높이 올라서 지저귀다가 보리밭으로 하강을 하면 우리들은 "아! 저기에 둥지가 있구나!"하고 쏜살같이 달려가 보면 웬걸, 아무리 근방을 샅샅이 뒤져봐도 노고지리 둥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지치면 산으로 들로 헤매다니며 칡뿌리도 캐고, 짠대도 캐먹고, 입술이 자줏빛으로 변하도록 진달래 꽃잎도 참 많이도 따먹었다. 내가 살던 초가집의 뒷마당에는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유리알처럼 맑고 청초한 연푸른 잎이 가지 위로 고개를 내밀며 노란 감꽃들이 피기 시작하고, 아침에 일어나 뒷마당으로 나가보면 황톳빛 마당에는 감꽃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기도 했었다.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기도 하고, 장독대의 작은 단지에 소금물을 만들어 떫은 감을 주워다가 삭혀 놓고 배 고플 때마다 먹는 것도 그때의 우리들에겐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여름이 오면, 조산천 물가와 금호강은 온통 우리들 차지였다. 변변한 수영복조차 갖추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냥 빤쭈(팬티) 바람으로 물놀이도 즐기고, 사발 그릇에다 생된장을 넣고 흰 헝겊으로 씌운 다음 속칭 '사발모찌'를 놓아 피라미들을 참 많이도 잡았다. 사발을 놓고 고기가 들어갈 때까지 물장구치고 물싸움도 하고 멀리 가기 헤엄시합도 했다. 언제나 푸르른 와촌 들판도 나에게는 훌륭한 서정소곡(抒情小曲)의 무대였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면, 홀로 들판에 나가 한창 자라고 있는 벼 논배미 사이를 들여다보는 게 참 좋았다. 벼논의 이랑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선 오밀조밀 모여 있는 연녹색의 개구리밥이 보기 좋았고, 손가락만 한 청개구리가 벼잎에 올라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앙증맞은 모습이 좋았고, 초록색의 벼이삭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기 좋았다. 포대 종이를 뒤집어쓰고 혼자 앉아 소금쟁이들의 유희와 물방개, 미꾸라지, 송어 등등의 노니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했고, 함께 놀다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어느새 비는 그치고 넓고 푸른 와촌 들판의 머-언 저편에서는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찬란히 그려지고 있었던 광경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또 그 당시엔 읍민들의 문화적인 여가활용 영역은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가물에 콩 나듯이 서커스단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고향 사람들의 설렘과 기대는 온 동네를 뒤집어놓을 정도였다. 우리 꼬맹이들은 서커스가 뭔지도 모르면서 조산천에 나가 가설 중인 서커스단 천막의 위용(?)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으며, 악단들을 동원하여 트럭을 타고 나팔을 불고 광고용 삐라를 뿌려대며 하양읍내를 휘저을 때면, 우리들은 하루종일 차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먼지를 덮어쓰고 삐라를 줍느라 신이 났었다. 당시 서커스단엔 무명 가수들의 노래와 '장한몽' '흥부전' '심청전' '굳세어라 금순아' '울고넘는 박달재' 등등의 연극으로 촌로(村老)들의 혼을 빼놓았다.
여름밤, 쑥부쟁이 등으로 마당 한쪽엔 모깃불이 피워지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우리들은 가마니 한 장씩을 들고 조산천의 모래밭으로 나간다. 모래밭에 가마니를 깔고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면, 아! 금방 하늘에서 떨어져 내 눈에 와 박힐 것만 같은 영롱한 별들의 무리와 은하수의 운하들! 우리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삼형제별'과 '따오기' 등등의 동요를 불렀으며, 그때쯤이면 한여름밤의 더위는 저 만치 달아나고, 흐르는 물소리와 우리들의 노래는 은하수 물결을 탔다.
밤이 이슥할 즈음에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동네 아낙들의 개울 목욕이 시작된다. 그때만 해도 가로등이라든가 불빛이 없을 때라 달빛에 어렴풋이 부서지는 물결만 보였기에 금락리와 동서리 아낙들은 거의 매일 밤 조산천에서 야간 수영을 했다. 어떤 짓궂은 형들은 당시만 해도 귀한 ㄱ자 군용 손전등을 갖고 와 목욕 광경을 비추다 아지매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가을이 오고, 추석이 지나 와촌 들판의 벼들이 누렇게 익어 갈 때면,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이다병을 하나씩 들고 메뚜기 사냥을 나간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이라 고소하게 볶아먹는 메뚜기의 맛은 일품이었으며, 우리들의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어주었다. 또 추수가 막 끝날 무렵이면 양동이와 부엌칼을 들고 들판으로 나가 논우렁이들을 잡곤 했는데, 논바닥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곳을 칼로 파 보면 영락없이 논우렁이가 나오곤 했으며, 잠시 잡으면 양동이 한 통은 거뜬히 잡아 반찬거리를 장만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었다.
겨울이 되면 우리들은 더더욱 신이 났다. 당시 겨울놀이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팽이치기'와 '수게또(스케이트-썰매)타기' '딱지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등등의 놀이였다. 아버지한테 졸라 오리목으로 팽이를 깎아 만들고, 밑바닥엔 커다란 대못의 대가리를 박아, 하루 종일 골목에서 팽이를 치고 놀다 지치면, 모두 다 수게또와 창을 들고 조산천변으로 향한다.
그 당시 앉은뱅이 썰매가 대세였는데, 썰매 앞쪽에는 먹붓으로 폼나게 'MP'라고 쓰고, 신나게 타기도 했으며, 얼음물에 구멍 뚫린 양말이 젖기라도 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양말을 말리다 태워먹기도 했다. 포항 출신의 장대규 시인은 '동화 같은 겨울'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썰매 타던 하루는/ 새(鳥)발 같은 손/ 불구멍 난 양말이 눈치를 본다'라고 썼다. 이제 썰매타기나 얼음지치기는 지방자치단체의 겨울 축제와 농촌체험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얼마 전 어느 식당에서 썰매가 장식품으로 대접 받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기도 했는데, 차츰 박제(剝製)가 되어 가는 우리 어린 시절의 편린(片鱗)들이라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일요일이면 자전거에 몸을 싣고, 그 어릴 때의 편린들을 찾아 금호강변과 와촌 들판으로 또 다른 나를 찾아 헤맨다. 10대 후반에 공부한답시고 고향을 떠난 뒤, 얼마나 가슴속에 사무쳤던 고향의 강이며 들판이었던가! 이제 부모님의 영좌(靈座)가 계시고, 형제들이 있고, 언제든지 술 한잔에 옛이야기 나누자고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오는 그때의 소꿉친구들이 있으며, 언제나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무학산과 금호강, 벼 이삭 넘실대는 와촌 들판이 있기에 10여 년 전 나는 망설임 없이 다시 '나의 살던 고향'으로 귀향을 했다. 그 어릴적 물놀이하던 상택이, 만우, 영배, 봉수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영보, 건식이, 동환이, 영수, 무식이 친구는 아직도 고향을 보듬고 있는데….
대구미래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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