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경보(競步)

영국의 거물 사업가 윌리엄 러트랜드 경은 예정보다 이틀 먼저 출장지인 도쿄에 도착한다. 하지만 올림픽 때문에 도쿄에서 숙소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 애를 태우던 윌리엄은 영국대사관의 주선을 뒤로하고 직접 잠자리를 찾아나선다. 크리스틴이 하우스메이트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딱지를 맞는다. 겨우 설득해 방을 빌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온갖 소동이 벌어진다.

훈남 캐리 그랜트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 '뛰지 말고 걸어라'(Walk Don't Run)의 줄거리다. 1966년 콜롬비아영화사가 제작한 이 영화는 1964년 도쿄올림픽이 그 배경.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경보(競步'Racewalking) 경기다. 크리스틴(사만서 에거)과 경보 선수 데이비스(짐 허튼)의 청춘사업에 끼어든 윌리엄이 느닷없이 박서 팬츠 차림으로 경보 대열에 뛰어드는 등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경보는 중세 영국에서 하인이 주인의 마차를 쫓아다니며 걷거나 뛰던 것이 효시다. 이후 스포츠로 발전해 1866년 7마일(약 11㎞) 경기가 영국에서 처음 벌어졌다. 이후 1908년 런던올림픽 때 공식 종목으로 채택돼 남자 3,500m와 10마일(약 16㎞) 경기가 열렸다. 이후 올림픽 대회별로 10'20'50㎞ 경기가 치러지다 현재는 20㎞ 남녀 경기와 50㎞ 남자 경기만 남았다.

경보는 두 발을 지면에서 동시에 떨어지지 않고 나아가는 경기이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전진한 발은 뒷발을 지면에서 떼기 전에 지면에 닿아 있어야 한다. 착지할 때 다리가 펴지지 않거나 양발이 지면에서 모두 떨어지면 반칙이다.

경보는 우리나라에서 선수층이 가장 옅은 종목일 만큼 관심도가 크게 떨어진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기를 더하고 있지만 28일 대구 도심에서 펼쳐진 경보 남자 20㎞ 경기는 시민들에게는 생소했다. 다만 '한국 경보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김현섭 선수가 6위로 골인해 그나마 경보에 대한 인식이 조금 올라갔다.

이번 대회에서 메달이 기대되는 몇 안 되는 한국선수였다는 점에서 아쉬운 성적표였지만 세계선수권대회 경보 종목에서 처음 톱10에 들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마라톤을 제외한 육상 종목에서 우리 선수가 시상대에 오르는 날이 언제가 될지 궁금해진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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