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 지역공동체로 가자

지난해 가을 지인의 밭에서 무와 배추 농사를 지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을 했는데 배추나 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벌레가 골칫거리였다. 연두색부터 까만색까지 다양한 벌레들이 어린 배추의 싹을 잘라버리거나 남김없이 먹어버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배추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기 전까지는 매주 배추벌레를 잡는 것이 일이었다.

배춧잎을 들추면 벌레가 꼬물거리며 기어다닌다. 이놈을 손으로 잡아 눌러서 죽여야 하는데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농사일 배우러 가서 엄살을 떨 수도 없고 꾹 참고 벌레를 잡아 죽였다. 농사일 스승에게 우리가 배추 먹자고 벌레들 죽이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자 대뜸 '天地不仁'(천지불인)이란다. 사람이 살려고 평소에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는데 왜 이 일에만 유독 예민하게 구느냐는 말씀이다. 순간 머쓱해지긴 했지만 일상 속의 수많은 죽임에 무감각해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죽임의 일상화는 현대문명이 편리라는 이름으로 진화해 갈수록 더욱 공고해졌다.

"살인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는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꺼리는 동족을 죽이는 일에 이 문명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럽과 태평양 전투에 참가한 400개 중대 수천 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 미군 소총수 가운데 15~20%만이 적을 향해 총을 쐈다는 것이 드러났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전쟁에서 총격전은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두 부대가 총격전을 벌였는데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대다수의 병사가 총을 쏘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는 발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미군 소총수의 사격 비율은 90~95%까지 올라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사격 표적지를 사람의 모양으로 바꾼 것을 비롯해 훈련과정에서 적군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프로그램화된 때문이다. 얼마 전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에서 보여지듯 이제는 동족을 죽이는 일이 인터넷 게임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동족을 죽인 사람은 아무리 그 행위가 자연스럽다고 하더라도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현대전(現代戰)에서는 살아남더라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죽임이 가상현실과 현실 양쪽에서 모두 일상화되다 보니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살아가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이유는 현대문명의 야만성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문명의 속살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야만적인 모습으로 진화해 가면서도 그 껍데기는 짙은 화장을 한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답게 포장돼 왔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경제활동에서 가장 빛난다.

어느 경제기사를 인용해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재벌 대기업의 수출실적을 위해 사실상 환율을 조작해왔다. 원화 가치가 낮을수록 수출품의 현지 가격도 떨어져 매출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정부는 원화 가치의 상승을 막으려고 수시로 외환시장에 개입해 달러를 사들였다. 이렇게 사들인 달러의 누계가 바로 외환보유액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외환시장 개입으로 대기업들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의 경우 정부의 환율조작으로 연간 9조원의 매출확대 효과를 누린다고 한다. 겉으로는 기업이 잘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국민세금을 쏟아 부은 덕택이다. 그 결과 수입물가 상승으로 서민들은 생활경제가 피폐해지고 기업은 늘어난 수익금을 어쩌지 못해 보너스에 배당금에 돈 폭탄을 맞고 있다. 지금도 세계경제의 위기에서 고생하는 사람은 서민들이고 주식의 널뛰기에 손해를 보는 이는 개미투자자들이다. 이렇듯 경제의 겉은 세계화되고 첨단화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오히려 빈부의 격차만 더 벌어지게 만드는 구조일 뿐이다. 지금과 같이 풍요로운 시대에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늘어만 가는 이유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제를 살린다고 서민의 주머니를 쥐어짜고, 평화를 지킨다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성장과 풍요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되고 있다. 현대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 효율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소수의 이익을 챙기고 필요하다면 동족을 죽이는 일조차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런 제도를 굳이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한편에선 국가, 그러니까 국민을 위하지 않는 국가가 굳이 필요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는 국가주의에 기대어 성장해 왔다. 겉으로는 국민 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소수 이익의 극대화였다.

이제 현대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넘어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소통 가능하고 순환 가능한 경제구조를 만드는 일이 살림의 문화로 진입하는 지름길이다. 그 길에 농업이라는 화두가 자리 잡고 있다.

안재홍(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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