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자위원 칼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 혹은 가벼움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공산주의 아래에서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가벼우면서도 결국은 무거워지고 마는 사랑 이야기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영어 제목이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그 가벼움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늘 엄청난 무게로 끌어당기는 지구의 힘에 짓눌려 굴복하면서 살아간다. 그리스 신화 속의 거인처럼 대지와 접촉함으로써 힘을 얻고 신체의 대부분을 땅에 접촉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늘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꿈을 꾸지만 무거운 육체는 땅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유명한 팝송 '철새는 날아가고'는 인간의 이런 숙명을 잘 표현하였다. "나는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되고 싶네/ 그럴 수만 있다면 확실히 그럴 거야/ 차라리 저 멀리로 날아갈 거야/ 여기서 저 멀리로 가버리는 백조처럼/ 인간은 대지에 묶여서 슬픈 소리로 세상을 향해 울지/가장 슬픈 소리로"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자들이 지금 모두 대구에 모여 있다. 그들은 지구의 무게를 견뎌내며 끊임없이 질주하고, 도약하고, 투척한다. 그들의 다리는 가장 짧은 순간 땅과 접촉하며, 그들의 몸은 가장 높이 공중으로 오른다. 그들의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의 가벼운 움직임은 보는 이에게 찬탄과 함께 경건한 마음까지 갖게 만든다. 인간은 이성(理性)의 힘을 이용하여 자연을 정복하여 왔지만, 인류 문명의 시작은 그보다 앞서 인간이 두 발로 걷고 달릴 수 있게 된 때, 즉 중력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 성공한 때부터인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맨몸으로 벌이는 분투는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것으로 조물주에 대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되었던 기록들은 오래지 않아 새롭게 등장한 누군가에 의해 깨어지곤 했다. 여자 장대높이뛰기에서 세계기록 보유자인 이신바예바의 추락은 신의 명령을 어기고 태양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다가 태양열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 에게해에 추락하여 죽은 이카로스를 떠올리게 한다. 더 높은 목표는 아마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대회가 중반을 넘기고 있지만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큰 기대를 걸었던 스타들의 몰락이다. 신문의 가장 좋은 자리와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였던 스타들이 정작 대회에서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지면을 장식하지도 못하였던 선수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허탈함은 세월은 흐르고 새로운 세대가 앞선 세대를 끊임없이 밀어낸다는 진리를 무시한 벌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그 변화의 조짐을 똑바로 보지 못한 탓일 것이다. 어쩌면 육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일시적이고 얕은 것이어서 그러한 흐름을 읽어낼 능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대회로 인하여 우리 도시는 훨씬 가벼워지고 젊어졌다. 또한 사람의 신체가 가진 아름다움과 힘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지성과 정신의 힘을 우선하였던 전통 속에서 천대받던 육체가 새삼 주목받게 된 것이다. 철학자 니체가 말한 것처럼 영혼이란 신체의 일부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피안의 세계를 꿈꾸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형제들이여, 차라리 강건한 신체에서 울려오는 음성에 귀기울여라. 그것이야말로 좀 더 정직하며 순결한 음성이다."

대회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영웅들의 모습은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자들이 모여 서로 각축하고, 환호하고, 좌절하는 것을 지켜본 우리들은 이제 현세의 삶의 즐거움을 예찬하고, 신체를 경멸하지 않으며, 과거의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시민들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소동들이 무슨 소용이랴! 

이재동(매일신문 독자위원·대구지방변호사회 교육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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