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봄이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첼리스트 P의 흥분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귀를 울린다. 연주까지 잠깐 시간이 남아 이웃한 전시장을 들렀는데 사진 작품을 보는 순간 너무 눈물이 나와 구석에서 눈물 훔치노라 작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단다. 작가 이력을 보니 루게릭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분인데, 사진 한 컷 한 컷에 담긴 이야기들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아 자신이 연주한 CD에 인사말을 적어 전하면서 언제 기회가 되면 꼭 당신 앞에서 연주를 해드리고 싶다고 했단다. 마침 친하게 지내는 작가분의 소개로 다음 달에 제주를 가면 그분을 만날 예정이라고 했더니 무조건 첼로 들고 같이 가서 연주를 해드리겠단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 사람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의 증인이 되었고, 그로부터 두 달 뒤 그분은 세상을 떠났지만 나와 제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살다 보면 소리 내어 울고 싶거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배낭 메고 훌쩍 떠나 제주의 산과 들을 하염없이 걸으며 마음속에 쌓인 일상의 찌꺼기들을 털어내곤 한다.
또 제주가 마음의 고향이 된 데는 한라산 중턱 억새밭에 10여 년간의 노고 끝에 지은 '외딴집'에서 제주 풍경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는 K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촬영 다니다가 발견한 제주의 숨겨진 속살들을 곳곳에서 들춰내 보여주면서 제주의 사람과 풍경들을 얘기해준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울음처럼 들리던 신영 영화 박물관 앞의 '큰 엉', 올망졸망 모여 있는 모습이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 평화로운 '동거미 오름' 근처의 수많은 작은 '오름'들, 단풍이 너무 고와 현기증이 나던 '사려니 숲', 어느 여름날 밤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K형의 '외딴집' 뒷마당에 누워 함께 바라보던 별똥별들의 축제…. 제주의 이런 풍경 속에 나를 맡기고 자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노라면 지친 내 몸과 마음은 어느새 다시 생기를 띠곤 한다.
제주는 스쳐가는 인연은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준 곳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작가 분을 간호하던 S선생은 만난 적은 없지만 치료에 관련된 문제로 7년 전 몇 번 전화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이후론 소식이 끊겼었다.
지난해 설날 발길 닫는 대로 표선 바닷가를 걷다 보니 토산이라는 낯익은 지명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편지를 주고받을 때 주소가 토산 보건지소로 되어 있던 생각이 나서 혹시나 싶은 맘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통화가 되었고 근처를 지나다 생각이 나서 전화를 드린다고 했더니 설날이지만 나와서 근무 중이라며 막무가내로 들렀다 가란다. 한참을 걸어 사무실을 찾았더니 마침 점심 무렵이었고, 설날인데 어디 가 식사를 할 수 있겠느냐며 보건지소에 딸린 자그마한 안채에서 잠깐 사이에 밥을 짓고 고등어를 구워 밥상을 차려내는 것이었다.
전날 여관에서 자고 아침은 갯바위에 앉아 초콜릿으로 때운지라 그날의 점심은 평생 가장 호사스러운 설날 음식으로 기억에 남는다. 늘 만나던 사람처럼 잘 먹었다는 인사만을 남기고 뒤돌아서는데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만 같아서 발걸음이 무겁진 않았다.
해마다 겨울이면 허리춤까지 쌓인 눈길을 뚫고 장엄한 눈꽃과 찬란한 햇살, 머릿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칼바람이 그리워 한라산을 오른다. 온갖 시련을 겪고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엄마 같은 한라산의 품에 안기면 너무나 편안해서 눈물이 난다. '설문대할망'의 탄생 설화처럼 제주는 슬픔이 하늘에 닿아 섬으로 변한 곳인가 보다.
얼마 전 거친 바람과 파도와 등대와 초원이 만들어내는 황량한 아름다움이 제주 최고이던 섭지코지에 들렀다. 그런데 그 아름다웠던 풍경 한가운데에 세계적 건축가가 지었다는 웅장한 건축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도 개발이냐 보존이냐는 우리 시대 최고의 난제가 답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마다 소중한 인연들이 닿아 있는 제주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래도록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강민구(KMG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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