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은 누구인가/김진애 지음/샘터 펴냄
건축가 김진애는 집을 '어디냐? 몇 평이냐?'고 묻는 대신 '누구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은 같은 시기에 지어진, 같은 모양의 집이라도 사는 사람에 따라 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집 상태와 가구, 물건만 보아도 그 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 유명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기계다'고 정의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집 역시 기계처럼 빈틈없이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20세기의 집들은 '동선이 짧아야 효율적이다'는 대전제 아래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지어졌다. 동선이 짧을수록 공간을 넓게 쓸 수 있고,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 김진애는 이 생각이 꼭 옳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동선이 짧으니 만남이 적고, 만남이 적으면 이야기가 적고, 이야기가 적으니 정(情) 낼 일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근대화와 산업화 당시 우리에게는 동선 짧은 집, 즉 효율을 극대화한 집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효율성 높은 아파트가 집을 '잠만 자는 공간'으로 만든 측면도 있다. 집은 다만 먹고 자는 공간, 나머지는 대부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생활패턴을 강화하는 데 동선 짧은 집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빈틈없이 있을 것만 있는 집과 여지를 남겨놓은 집은 동선뿐만 아니라 체험에서 차이가 난다. 지은이 김진애는 옛날 우리네 집과 요즘 아파트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마당을 거론한다. 마당은 딱히 그 기능이 한정된 공간이 아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둘 수 있었다. 아무 일 하지 않고 내버려둬도 이상하지 않았고, 텅 비워 두어도 낯설지 않았다. 말하자면 '마당은 비어 있는 방', 즉 여백인 셈이다. 이 여백의 유무는 사람살이에도 많은 차이를 낳는다.
마당 덕분에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살아도 옆집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마당이 있기에 입을 모아 한 집을 흉볼 수 있었고, 마당이 있기에 이웃과 담소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마당은 수많은 이야기와 훔쳐보기, 흉보기를 가능하게 하며 사람살이를 살찌운다.
내 방 쪽마루에 나와 앉아 마당 건너편의 옆방 쪽마루에 앉은 입주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다. 마당은 누가 독점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동시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당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웃집 아줌마와 수다를 떨 수 없다. 수다를 떨려면 그녀를 혹은 그를 내 방으로 들이거나 내가 그집 방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부담스럽다. 마당은 개인에게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면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집을 사물이 아니라 존재로 정의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거기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흔히 입주 전 휑한 아파트를 구경하거나, 이사 전 빈집을 둘러보면 '좁다'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막상 벽지를 바르고, 가구를 들여놓고 보면 '생각보다 넓고 살 만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 점이 바로 집과 사람의 관계다. 그러니까 집은 휑한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이 거기 들어가 살 때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빈집은 집이 아니라 건축물에 불과하다. 사람이 떠난 집이 곧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38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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