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돼지국물

썰다 남은 돼지비계 한 모타리가 아쉬운 옛 추억

술이 떨어지면 처량해진다. 마시던 술을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되면 애통하고 슬퍼진다. 장거리 산행 중 배낭 속에 넣어간 술이 모자랄 경우에는 쉽게 포기할 수 있다. 갈 길이 먼데다 가게 있는 곳까지 내려가려면 올라올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주변 친구들이 맘에 들어 한창 술이 당길 때 외상을 주지 않는 낯선 술집에서 돈이 없어 술을 더 마시지 못하게 된다면 이처럼 난감한 일은 없다. 이 상황은 슬프긴 한데 눈물은 나지 않는다. 눈물 대신 '씨부랑탕!'하고 욕이 튀어나온다.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를 발로 차고 싶고 서있는 전봇대를 밭다리 후리기를 해서라도 넘어뜨리고 싶은 그런 심정이다.

슬픔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머니의 임종, 연인과의 이별, 예고 없는 실직, 강아지의 죽음 등등.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모자라 발가락이 동원되어야 하겠지만 대체로 구분하면 단순슬픔과 복합슬픔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걸 다르게 표현하면 눈물이 나오는 슬픔과 욕이 나오는 슬픔으로 나눌 수 있다. 슬픔의 미학을 꽤 재미있게 해부한 결과라면 남들이 웃지 않을까.

가난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창녀 크리스틴의 축 처진 젖가슴이 드러난 알몸을 스케치한 후 '슬픔'(sorrow)이란 제목을 붙였다. 일본의 여류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풍경은 도쿄타워에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슬픔을 창녀의 알몸과 비 맞은 탑에 투영시켜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술을 마시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좌절되었을 때의 슬픔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 슬픔의 현장으로 달려가 보자. 대학 1학년 여름이었던가. 친구 넷이 모여 호주머니를 다 뒤져 봐도 돈은 달랑 100원뿐이었다. 당시 대구 염매시장 돼지국물 집 막걸리 한잔 값이 10원이었던 시절이다. 흥정을 잘하는 얼굴 두꺼운 친구가 100원을 미리 내고 막걸리 12잔을 마시기로 합의를 보고 각자 3잔씩 마셨다.

평생 살아오면서 술이 떨어져 처량해진 경우를 당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그러나 이날만은 영영세세 잊히지 않는 국치일 같은 날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우린 술을 마신 지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들이었지만 주량으로 따지면 막걸리 두어 되는 마셔야 술 트림이 날 정도였다.

안주라고는 시어 빠진 먹다 남은 김치 쪼가리와 소금을 친 돼지국물뿐이었지만 쉽게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아 뭉그적거리며 앉아 있었다. 막걸리 낱잔으론 술이 턱없이 모자라 입맛만 쩍쩍 다시고 있어도 '뚱보 아지매'라 부르면 딱 맞을 장구 통같이 생긴 여주인은 낡은 부채로 파리를 잡는다고 허공에 대고 헛손질만 하고 있을 뿐 우리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친구 넷 중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나뿐이었으나 셋은 아버지가 계셔도 집을 나갔거나 중풍이 들어 거동이 불편한 있으나마나 한 그런 처지였다. 우린 가난 속에서 몹시 허기져 있었고 고기를 먹어 본 지가 모두들 오래된 듯했다.

우리가 막걸리를 마시며 훌쩍거리던 그 돼지국물 속에 썰다 남은 돼지비계 한 모타리라도 넣어 줬다면 그동안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시각에도 그 여주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우린 그 주인의 복스럽게 생긴 통통하게 살찐 손을 향해 '한 이백 년 정도 사시라'는 진정어린 축원기도를 올렸을 텐데. 단언하거니와 그날 만났던 뚱보 아지매는 우리의 축원이 얹어주는 장수는커녕 사주에 얹어준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디룩디룩한 살찜만 앞세우고 일찍 이승을 떴으리라.

요즘도 장거리 여행이나 유적답사를 갔다 늦게 돌아오는 날은 돼지국밥집을 찾아간다. 국밥과 함께 막걸리가 나오면 나만의 의식을 엄숙하게 거행한다.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경례는 생략한다. 먼저 간 선열들의 묵념 순서에는 뚱보 여주인을 떠올리며 '오등은 자에 아 그날 돼지비계 한 모타리 어쩌구 저쩌구'란 내가 지은 '돼지국물 선언문'을 기미독립선언문처럼 읊조리며 잠시 고개를 숙인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