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애틋한 사랑, 부모의 자식 사랑을 뛰어넘는 영혼의 사귐이 있다는 사실을 이오덕과 권정생은 보여주었다. 둘은 12살 터울을 너머 존경과 그리움의 교분을 30년간 쌓았다.
동화 '강아지똥'을 읽고 감명받은 이오덕이 1970년대 초 권정생을 만나러 안동을 찾았다고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둘의 인연은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오덕의 장남 정우(66) 씨는 "내가 1968년 군에 입대하기 직전에 형(권정생)이 사는 안동 일직면 조탑리 교회를 찾아가 인사를 했다. 선친과 정생 형과의 인연은 그 전에 시작됐다"고 했다.
권정생은 타고난 동화작가였지만 글씨가 비뚤비뚤했다. 읽기 힘들다는 이유로 출판사 사람들이 권정생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오덕은 안타까워했다. 이오덕은 권정생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했고, 작품이 나오면 신발이 닳도록 출판사를 찾아다녔다. 혹여나 권정생이 굶지 않을까 걱정하며 수시로 돈을 보냈다.
권정생은 이오덕의 충주 집에서 1년간 지내기도 했다. 둘이 나눈 각별한 정은 1972년부터 30년간 나눈 편지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마음 놓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중략) 늘 소외당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권정생)
"산허리에 살구꽃 봉오리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괴로울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해 봅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을 써주시길 빕니다."(이오덕)
이오덕 선생 부고를 들은 날 권정생 선생은 종일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조문을 가는 대신 자신의 방식대로 홀로 이오덕을 그렇게 떠나보낸 것이다.
이오덕 선생은 임종 전에 일절 조문객을 받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 다만 자신이 묻힐 곳 근처에 세울 시비를 지정해 남겼다. 시비 하나에는 권정생의 시 '밭 한 뙈기'를, 다른 하나에는 자신의 시 '새와 산'을 새겨 넣도록 했다. 그의 무덤이 있는 부용산 자락 아래 이오덕 교정에는 두 사람의 시비가 마주서 있다.
김해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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