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5부-소통과 변화의 수용 <3>어린이와 우리말 사랑, 이오덕

"남 위에 올라서도록 하는 교육으론 희망없다" 참교육 올곧게 실천

이오덕학교에는 이오덕 선생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생전에 이오덕 선생이 쓰던 침실에 마련된 빈소에는 장남 정우(66) 씨가 직접 만든 이오덕 조소와 유품 등이 놓여 있다.
이오덕학교에는 이오덕 선생의 빈소가 차려져 있다. 생전에 이오덕 선생이 쓰던 침실에 마련된 빈소에는 장남 정우(66) 씨가 직접 만든 이오덕 조소와 유품 등이 놓여 있다.
이오덕학교 교정 전경. 두 개의 시비가 보이는데 앞의 것이 이오덕 선생 시비, 뒤쪽이 권정생 선생 시비이다.
이오덕학교 교정 전경. 두 개의 시비가 보이는데 앞의 것이 이오덕 선생 시비, 뒤쪽이 권정생 선생 시비이다.
이오덕
이오덕
이오덕 선생이 1983년 성주 대서초교에서 아이들과 풀베기를 하고 있는 모습.
이오덕 선생이 1983년 성주 대서초교에서 아이들과 풀베기를 하고 있는 모습.

꽤 오래전 일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은 떠들거나 딴짓하는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내는 일을 반장에게 시켰다. 이름이 적힌 학생에겐 벌금을 물렸다. 그런데 떠들지도 않았는데 이름이 적히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반장과 친한 학생은 떠들고 소란을 피워도 이름이 적히는 법이 없었다. 매번 이름이 적히는 것은 키 작고 힘 없으며 반장과 친하지 않은 학생들이었다. 벌금을 걷는 일도 반장 몫이었는데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반장의 구내 빵집 출입이 부쩍 늘었다. 그것은 정의롭지 않은 권력 행사였다. 친구를 감시케 해 서로 못 믿게 만드는 비교육적 현장, 이것이 북한의 5호담당제와 무엇이 다를까. 만일 30여 년 전 기자가 학교에서 겪은 부조리를 목격했다면 아마도 불처럼 역정낼 이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오덕(1925~2003) 선생이다.

◆어린이는 순수한 원형이자 희망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 한글운동가인 이오덕 선생은 1925년 경북 청송에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들이 아이를 가르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교사가 됐다. 1944년 고향에서 교직에 발을 디딘 1986년 교단을 떠날 때까지 42년간 교육현장에서 어린이들과 함께했다.

선생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인 어린이'청소년들이 점수 경쟁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내몰리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는 교육이 아이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생명을 말려죽인다고 보았다.

선생은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교육을 꼽았다.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 교육은 일제 군국주의 식민지 노예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았다. 군대식 훈련과 민주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생각과 느낌을 강요하면서 우리 교육은 '점수따기 교육', '살인 교육'이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서로 해치고 남의 위에 올라서도록 하는 반인간적인 교육을 집어치우는 것, 이것밖에 우리가 살아날 길은 없다."

선생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어린이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고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놀이와 일, 공부 세 가지가 하나로 되는 것이 참교육의 길이며 이를 교사들이 먼저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들은 잘못된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아이들이 그 병든 꿈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빛이 된 우리말 지킴이

선생은 우리말 지킴이였다. 한자말과 외래어, 외국어의 거센 물결 속에서 고집스레 우리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일에 온몸을 바쳤고, 살아있는 우리말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글짓기'라는 말 자체를 혐오했는데 어린이들에게 허위와 거짓이 담긴 글을 강요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들이 자기 삶을 솔직하고 자세히 글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글쓰기 교육'과 같은 새로운 개념어를 만들어 처음 사용했다.

선생은 강직하고 올곧았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었고 그른 것은 100년이 흘러도 그른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그의 문학을 용공문학으로 몰아 탄압했다. 선생은 교육당국의 미움을 사 18번이나 학교를 옮겨다녔고 강압에 못 이겨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선생은 교육자들이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어린이들을 비인간으로 몰아가는 일을 교육의 이름으로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교육자는 어린이들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평생 이를 실천했다. 선생의 이 같은 신념과 사상은 참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교육이념을 따랐다. 그는 이제 '이 시대의 선구자이자 교사'로 추앙받고 있다.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348의 2번지 고든박골 1만 평 대지에는 선생의 유지를 계승한 '이오덕학교'가 있다.이 학교는 여느 학교와 완전히 다르다. 비록 정부로부터 학업 과정을 인정받지 못하지만 어린이'청소년을 사람답게 키우는 것을 지향하는 자유학교(Free School)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문을 연 이 학교에서 아이들은 ▷남을 해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사는 법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 ▷일하고 공부하고 노는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배운다.

이 학교 이정우 큰선생님(이오덕의 장남)은 "이오덕학교에는 교과서가 없다. 그러나 역으로 교과서(자연)가 너무 많다. 일등을 뽑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현재 11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공부하고 있으며 교사는 8명"이라고 했다. 자연을 벗 삼아 놀며 일하며 공부하다 보니 학업이 떨어질 것 같지만 아이들이 초교 졸업할 나이쯤이면 아큐정전 논문을 척척 써낸다고 자랑했다.

선생은 암이 온몸에 퍼진 뒤에도 꼿꼿했다. 2003년 8월 25일 새벽 작은 수첩에 마지막 일기를 쓰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어린이협의회 회장과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장, 우리말살리기모임회장 등을 맡았고 8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이오덕 주요 연보

1925년 11월 14일 청송군 현서면 구석들(덕계리)에서 태어남

1943년 2월 25일 영덕군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 졸업

1944년 4월 7일 청송군 부동면 부동공립초등학교 촉탁교원 부임

1946년 8월 6일 맏아들 정우 태어남

1955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 발표로 등단

1965년 첫번째 책인 '글짓기 교육-이론과 실제' 출판

1973년 3월 1일 봉화군 삼동초등학교 교장 부임

1976년 제2회 한국아동문학상 받음

1983년 8월 20일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결성

1986년 2월 28일 성주군 대서국민학교 교장 퇴임

1989년 10월 29일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결성

1999년 5월 31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로 이사

2002년 10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받음

2003년 8월 25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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