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니 우리 동네 아 아이제."
아뿔싸, 이 길은 내가 다녀야 할 길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북쪽의 황오시장 근처 녀석들과 전쟁 중이었다. 순간적으로 대여섯 명이 나를 둘러쌌다. 가장 덩치 큰 녀석이 멱살을 잡는 순간 내 몸은 하늘로 붕 떠올랐다. 털썩 땅에 떨어지고서야 아득하고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이 등으로부터 전해졌다. 그대로 뻗어 일어나지 못하자 녀석은 내심 걱정스러운지 한소리를 하고 얼른 사라진다.
"일루 댕기지 마라 안 캤나. 니가 온 기 잘못인기라. 이기 유도라 카는 기다."
엎어치기와 엄포를 제대로 당하니 부끄럽고 아프고 억울하고 분하였다. 쪽샘 육거리의 목욕탕에서 황오시장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은 우리가 적이라 부른 녀석들의 근거지였다. 고향에서 '우리'라는 범위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좁았다. 우리의 근거지는 남쪽의 황오경로당에서 북쪽의 심인당을 잇는 골목길 언저리로 정해져 있었다. 직선거리로 300m 남짓할까. 그 중심에는 우리가 진지라고 여긴 신라 고분이 봉긋 솟아 있었다. 그때는 서너 살 터울의 한 패거리 꼬마들이 각자의 동네를 가로지르는 골목길을 자신들의 터전이라 여겼다. 골목길 언저리에 고분이라도 있다면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높은 고분은 먼 곳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진지 놀이에 안성맞춤이었고, 사철 내내 비료 포대로 미끄럼도 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고분에 연탄재를 쌓아두고 기습할 날만 기다렸다. 황오시장 옆에는 우리 동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분이 있었는데, 그쪽 아이들도 그곳에 자주 모여 진지 놀이를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시작된 기습은 연탄재 폭탄을 던지며 시작되었다. 열두어 명이 한꺼번에 연탄재를 던지며 나무칼을 들고 돌격하자 녀석들은 꽁무니를 빼기에 바빴다. 그들이 달아나는 골목과 집에 연탄재를 던져 난장판을 만들었고, 우리는 잽싸게 빠져나와 각자의 집으로 조용히 숨었다. 녀석들의 반격보다 혹시나 그 동네 어른들이 찾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왜 황오시장 근처의 녀석들과 전쟁을 시작하였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쪽 아이들은 절반 정도가 월성초등학교 소속이었고, 우리 모두는 황남초등학교를 다녔던 것만 달랐을 뿐이다. 남쪽 영남성냥공장 근처 아이들과 별 다툼 없이 지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다니던 학교 때문인 것이 아닐까 한다.
여느 곳처럼 우리 동네에도 톱밥난로가 지글지글 끓던 이발관과 막걸리를 내리던 술도가가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 제법 큰 제재소와 성냥공장이 있었던 점은 조금 독특하였다. 가내수공업이었지만 국수공장과 석물공장도 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였지만, 도심에 가까운 곳임에도 몇몇 집에서는 소나 돼지를 한두 마리 키웠다. 베이비부머의 마지막 세대이었기에 곤궁한 집안에도 아이들은 많았고, 이 아이들의 숨바꼭질, 딱지치기, 고무줄놀이로 골목은 항상 시끌벅적하였다. 그런데 남자어른들은 참으로 무기력했던 듯하다. 대체로 반쯤은 할 일이 없어 점방에서 오후쯤이면 두런두런 술잔을 나누는 게 일상이었다. 반면에 여자어른들이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래서였을까? 밤이면 세간이 두어 개 부서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담장을 넘기도 하였다. 모든 남자들이 골목길에 나선 날은 어김없이 스포츠 중계가 있었다. 점방 안쪽 깊숙한 곳에 놓인 텔레비전에 축구나 고교야구가 중계되는 날은 어른 아이 모두 모여 환호와 한숨을 번갈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은 여느 중소도시에서 도심을 비켜난 골목길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내가 자란 고향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우선은 무엇보다도 신라 무덤과 집이 나란히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쪽 너머 또 다른 골목길인 '쪽샘골목'을 들 수 있겠다.
우리 동네 골목길에 있는 신라무덤은 '황오리 53호 무덤'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무덤 끝자락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표석이 있었는데, 이 표석을 언젠가 동네 어른들이 땅에 묻어버렸다. 이 고분은 어린 우리에게 놀이가 시작되는 곳이었지만, 어른들의 대소사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였다. 잔치나 초상이 나면 돼지는 항상 이곳에서 한참을 울부짖으며 죽었다. 곡괭이나 도끼로 내리칠 때마다 돼지의 울음이 목청 터져라 온 동네에 퍼졌고, 어찌 알았는지 시내의 거지들은 몽땅 모여들었다. 또한 출상 때면 상여 앞에 상주가 올린 마지막 밥상이 차려졌다. 이곳에 올라서면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남쪽으로 남산과 월성 및 첨성대가 보이고, 서쪽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거대한 신라 무덤이 성큼 다가올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70년대 초중반 '황남대총'의 발굴 광경을 매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렇게 큰 무덤에 덧집을 씌우고 발굴하는 광경은 어린 우리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등하굣길에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하고 한참을 돌아 그 근처 미나리꽝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운 좋은 날이면, 비록 황남대총은 아니지만 대릉원 동쪽에 새로 만드는 도로에서 발굴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 집을 철거한 곳에서 질그릇을 가득 채운 무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집의 안방 밑이 바로 무덤의 한가운데였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아닌지 가끔 생각해 본다.
또 다른 하나인 '쪽샘골목'은 삐뚤어진 한 시대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경주에서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던 '쪽샘'이란 쪽박으로 떠먹을 수 있는 샘이었기에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그런 쪽샘보다 쪽샘골목이 유명해진 것은 이곳에 흔히 기생집이라 불리던 요정(料亭)들이 골목을 따라 쭉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도심을 약간 비켜나 있지만 골목 어귀가 도심과 바로 이어진 곳이 쪽샘골목이었다. 전국에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경주는 예외였다. 그러기에 전국의 술꾼과 경주를 찾은 관광객은 마음껏 한밤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가야금과 장구 소리가 하나둘 사라지고, 전자기타와 전자오르간 소리가 점차 늘어가던 때였다. 전자악기의 소리는 무척 크고 시끄러웠다. 이웃 골목임에도 잠자리에 들 즈음에 어김없이 방바닥을 울리며 쿵작쿵작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하여튼 어른들은 우리를 그 근처로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80년대 초까지의 흥청거림은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서서히 사라졌다. 꼭 이곳이 아니라도 전국 어디에서도 한밤의 자유가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기생관광은 경주의 모습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시내 곳곳에 요정이 넘쳐났다. 그러면서도 우리 어른들은 그들을 도외시하였고, 어린 우리는 분내가 넘쳐나던 그 골목을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일제강점기 자료를 뒤적이면서 그 뿌리가 100년을 넘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이야기이다.
오늘날 나의 고향은 있으나 있지 않다. 왜냐하면 집들이 거의 모두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살던 사람도 사라졌다. 드문드문 철거를 버티는 집과 골목길을 따라 설치된 하수도만이 옛 모습을 상상하게 할 뿐이다. 빈터가 된 옛 집터 사이에는 신라 무덤만이 우뚝 솟아 있다. 발굴조사 중이라는 푯말은 이곳이 유적임을 알려준다. 고향을 생각하면 흡사 수몰지역의 허망함이 다가온다. 가끔 정답이 이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체를 철거하고 신라 무덤만을 남기는 것은 유적에도 사람에게도 긍정적이지 않다. 집을 절반 정도 남겨 유적과 오늘날 사람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데, 기대 난망이다. 이미 너무 많이 사라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분칠로 죽은 유적을 만들어갈까 고향 골목길을 생각하면 먹먹해진다.
국립대구박물관장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