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마의태자 길'이 있다. 신라 마지막 왕자로서 천년 문화의 신라 경영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신라를 떠나야 했던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가 머물렀던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마의태자는 새로운 부활을 꿈꾸고, 준비했을 것이다. 이제 신라가 멸망한 지 1천 년이 훌쩍 넘어섰다. 안동에서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비운의 왕자에서 부활의 왕자로 거듭나고 있다.
◆마의태자, 은둔한 비운의 왕자였나?
고려 경순왕 9년이었던 935년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한다. 태자는 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가 전달됐다.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마의태자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마의태자가 왜 하필 당시에 그토록 귀부에 반대했던 적국 고려 땅인 금강산으로 들어갔는지,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곧바로 갔는지, 경주와 금강산 길 중간 지역 곳곳에서 전해지는 신라부흥운동에 대한 유적과 전설들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숙제가 남아 있다.
안동시 도산면과 봉화군 상운면 일대에는 이 같은 마의태자를 둘러싼 의문과 남아있는 숙제들을 풀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안동시는 이 일대를 '마의태자 길'로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강원도 인제의 마의태자 전설은 실제로 마의태자가 아니라 경순왕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인제에 있는 '김부리'라는 마을은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富)에서 따왔으며,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은 경순왕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이다.
마의태자는 신라를 떠나면서 아무런 저항 없이 금강산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신라에는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이들을 둘러싸고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이후 수백여 년 동안 곳곳에서 신라부흥에 관한 소문들이 끊이지 않았다. 안동지역에서도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을 꿈꾸며 절치부심했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마의태자, 용이 여의주를 품고 승천하듯 부활하나
마의태자 길 답사를 위해 용수사를 찾았을 때 마침 방방마다 하안거 결제를 마치고 편안하게 쉬러 온 통도사 낭하의 10여 명의 스님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분인 우봉 스님은 용두산 주위에 신묘하게 펼쳐져 있는 용 관련 이야기를 하면서 용수사 주지 스님의 법명이 '상운'(祥雲)이고 속명이 '기용'(起龍)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용이 일어나려면 상서로운(祥) 구름(雲)이 머리 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은사 스님이 법명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을 몇 번에 걸쳐 최성달(47) 안동시 역사기록 담당과 동행하는 동안 의문을 품을수록 신비롭게 다가오는 인연의 신묘한 실상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운명 같은 감회를 느꼈다.
용수사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자리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용수사 주위의 지명 또한 신기하게도 용과 관련성이 깊다. 용두산'용수사'용화전'용개천이 그런 경우다. 게다가 용수사 아래 마을인 운곡리와 위쪽에 붙어 있는 봉화군 상운면이라는 지명도 신묘하게 용수사를 둘러싼 하나의 연결성으로 되살아난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발아래에도 구름이 있어야 하고 머리 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모여야 그 힘으로 하늘로 비상할 수 있는데 발아래 구름을 찍어 차고 오르기 위해 운곡리가 존재하고 있다.
최성달 담당은 "안동과 도산면 일대의 진산인 용두산, 그 터전에 아득하게 내려앉은 용수사와 용화전, 그리고 절터를 휘감아 흐르고 있는 용개천. 이것들이 전해주는 의미는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는 어떤 기운이 전해짐을 말한다"고 했다.
◆마의태자 길, 안동에서 신라부흥 꾀했나
용수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동편 건물은 '마의당'(麻衣堂)이며 서편은 '월오관'(月午觀)이다. 모두가 마의태자와 관련이 깊다.
마의태자 길을 취재하는 동안 가장 의문스럽고도 신비로웠던 것들은 용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마의태자 길이 왜 하필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자리'라고 일컬어지는 용수사 산신각 뒤편으로 난 오솔길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용두산과 용수산, 용화전, 용개천으로 이어지는 이 일대 용 관련 지명이 품고 있는 전설은 과연 마의태자와 무슨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일까.
마의태자 길은 도산면 용수사 산신각에서 시작된다. 절 뒤편 오솔길을 따라 1㎞쯤 가다 보면 을미사변 때 불탄 영은암 자리가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마의태자가 경주 땅을 바라보던 '마의대'(麻依臺)가 나온다. 마의대에 앉아 바라보면 앞쪽은 신라 수도인 경주를 향해 있고 오른쪽에는 '국망봉', 왼쪽으로는 '건지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3㎞를 더 가면 마의태자의 전설을 간직한 '태자리'와 '태자사'가 나온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사방이 마의태자를 연상시키는 지명으로 빼곡하다. 용두산 중심에 고려 의종 때 국왕원찰로 지목됐던 용수사에는 마의당과 월오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산 정상에 자리한 마의대와 태자리, 태자사도 있다. 봉화 상운면에는 '신라리'라는 마을이 있으며 명호면에는 '관창리'라는 지명도 있다. 게다가 만리봉'투구봉'건지산'국망봉'달래재길과 월오리 등 망국의 한을 달래고 새로운 신라부흥을 위한 절치부심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용수사 주지 상운 스님은 "마의태자가 신라의 멸망을 부추긴 사실상 적국의 땅인 금강산으로 들어가 은둔하다 숨졌다고 전해지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고려로의 귀부를 반대했던 숱한 인물들과 함께 마의태자는 경주를 떠나 안강을 거쳐 안동 길안과 임하지역에서 삼베로 옷을 지어 입고 도산면과 봉화 상운면 일대에서 새로운 세계를 위한 터전을 마련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말했다.
최성달 담당은 "마의태자는 신라가 고려로 귀부한 뒤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구했다고 볼 수 있는데 용두산 인근 지역은 지금도 오지일 만큼 골이 깊지만 경주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급할 때 구원병의 요청과 잊혀지지 않은 존재로서의 심리적 작용 등 모든 것을 감안했을 때 신라부흥에 부응할 수 있는 지리적 요건과 심리적 요건 등 두 가지를 두루 갖춘 천혜의 장소다"고 했다.
◆마의태자 연상시키는 지명들
용수사 동편 건물은 마의당(麻衣堂), 서편 건물은 '월오관'(月午觀)이다. 월오를 해석하면 달이 대낮처럼 밝다는 뜻이다. 마의태자가 월오리를 넘어가다 밤에 달빛이 대낮처럼 밝아 망국 태자의 서러움과 한을 되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용두산 정상에는 '마의대'가 있다. 용수사 산신각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3㎞쯤 올라가다 보면 눈앞이 확 트인 곳에 큰 바윗돌로 만들어진 석좌대가 나온다. 이 좌대는 불상을 모셔놓은 것처럼 3단 기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마의태자는 경주를 바라다보며 울분을 달래고 신라부흥을 꾀했다는 것.
마의대에서 2㎞쯤 산길을 내려가면 '태자리'가 나오고 태자리 마을 안쪽 산자락 폐교된 태자초등학교 터는 '태자사'가 있던 자리다. 태자사 자리엔 낭공대사 비문의 귀두 부분이 남아 있는데 신라 김생의 글씨로 집자를 했다고 한다. 비문은 19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져가 현재 그곳에 전시되어 있고 청량산박물관에는 이 모형을 그대로 본뜬 낭공대사 비문이 전시돼 있다.
마의태자가 올라 경주 쪽을 바라보았다 해 이름 붙여진 '만리봉',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건지산', 마의태자와 신라부흥을 꿈꾸던 비밀무장결사대가 전투를 대비해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는 '투구봉'과 말을 훈련시켰던 '마장리' 등이 있다.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에서 봉화군 상운면으로 넘어가는 경계지역에 있는 달래재길은 마의태자가 스스로 한을 달랬다는 일화에서 이름 지어졌다. 봉화군 상운면에는 신라리라는 지명과 신남리, 신라재, 신라길, 신라초교 등 곳곳에 마의태자를 연상시키는 지명이 있다.
용두산 터줏대감인 농암 이현보 선생의 16대손 이종록(55) 씨의 믿음처럼 내년이면 이곳에서 부활하는 마의태자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 것은 이곳이 주는 어떤 신비로움이 단단히 한몫했다.
최성달 담당은 "이 일대는 분명히 마의태자가 머물렀던 곳이다"면서 "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지역의 대표 문화 콘텐츠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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