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최첨단(最尖端)

예술가들은 늘 최첨단을 걸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외줄 위에 선 어름산이처럼 무릇 예술가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혼과 정신을 벼려 바늘 끝에 세워놓은 듯, 자신의 예술에 오롯이 바치는 오체투지의 매순간을 살아야 한다. 시(詩)를 처음 배울 때 스승은 그렇게 강조하셨다.

뼛속 깊이 내려가 써라. 쓰고 또 써라, 하루에 한 줄이라도 써라. 아니면 책상이라도 물어뜯어라.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피를 잉크 삼아 글을 썼다고. 글쓰기의 근간(根幹)을 밝히는 이 경구는 그때부터 늘 시에 대한 회의가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나의 금과옥조(金科玉條)다.

예술, 특히 추상화나 요즘 시는 왜 이렇게 어렵나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아먹질 못하겠어요. 이토록 어렵게 표현해야 할 이유는 무언가요? 가끔 사람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늘 대답이 궁한 나는 뭉그적대며, 아마 선사시대 암각화가나, 쐐기문자로 점토판에 쓴 길가메시 서사시인들도 그 질문을 받지 않았을까요. 호메로스나 소동파, 레오나르도 다빈치, 박지원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모르긴 해도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예술가들 모두 당대의 최첨단이라 규정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늘 전통과의 단절을 꿈꾸고,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실험하려고 했을 테며, 종종 어제를 뛰어넘은 오늘의 작업을 위해 자신을 극단으로 내몰기도 했을 겁니다. 그것은 현재도 유효하다는 측면이 있죠.

선 하나를 제대로 긋기 위해 지구 둘레 길이만큼 선 긋기 연습을 한다는 화가나, 방점 하나, 조사 한 마디에 몇 날 며칠을 샌다는 작가들의 전설은 일종의 편집증적 증세로 치부하기보다 작품에 대한 예술가들의 염결성(廉潔性)으로 여깁니다.

도끼로 두꺼운 얼음장을 내리치는듯한 정신으로 세계를 인식(認識)해낸 예술가, 그들을 보고, 듣고, 읽는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최첨단을 만나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남은 예술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인류의 역사와 함께 갈 불멸(不滅)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나는 한없이 절망한다. 지금보다 많이 젊었을 때, 어느 매체를 통해 밝힌 버킷리스트에 이렇게 건방지게 썼던 기억이 난 까닭이다. '지구가 깨질 때까지 유효할 좋은 시 한 편 쓰기!'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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