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두 번도 제대로 보기 힘든 가족과 친척. 만나면 즐거워야 할 명절 모임이 오히려 우울하고 불쾌했다는 사람들이 적잖다. 늘 얼굴을 맞대는 가족 사이의 갈등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모든 것을 이해한답시고 걱정스럽다는 듯 건넨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고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든다. 마치 상대방 콤플렉스를 후벼 파놓고는 "어휴, 걱정이네. 아직도 그래서 어떻게 해?"라는 식이다. 물론 장본인은 잘못했다고 전혀 생각지 않는다. 가족이고 친척 사이에 걱정해서 건넨 말일 뿐이니까.
◆명절 가족모임, 얼굴만 울그락불그락
회사원 장주혁(32'가명) 씨는 이번 추석에 자청해서 당직을 섰다. 지난 설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큰집에 가기가 싫었기 때문. "나름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 한동안 취직을 못해 애를 먹었습니다. 비록 중소기업이지만 전망 있는 탄탄한 회사에 들어갔는데 친척들이 걱정만 늘어놓는 겁니다. '연봉이 얼마냐?' '오래 있을 건 아니지?' '결혼이 쉽지 않을 텐데' 등등. 얼굴은 굳어지는데 싫은 내색도 못하고 억지웃음만 짓다가 돌아왔습니다." 장 씨는 친척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나마 장 씨는 나은 편이다. 아직 취업하지 못했거나 결혼 적령기를 넘긴 경우, 명절에 친척집 방문은 고역이나 다름없다.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경우도 모여봐야 좋은 이야기가 나올 일이 없다. 특히 노부모가 아픈 경우, 병간호 책임을 둘러싸고 고성이 오가기 일쑤다. 한 호스피스병동 관계자는 "말기 암에 걸린 한 할머니가 있었는데, 명절이랍시고 가족들이 모이기는 했는데 오후 내내 고함지르며 싸움만 하다 돌아갔다"며 "아직 환자 의식도 또렷한데 곁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라고 말했다.
집안 대소사를 둘러싸고 갈등도 많다. 회사원 김모(45) 씨는 가족묘 만드는 문제로 대판 싸웠다고 했다. "벌써 10년 넘게 다투기만 했습니다. 물론 일가가 많다 보니 이견이 있겠지만 해도해도 너무 하네요." 김 씨 집안은 가족묘를 조성하는 위치부터 한 가족당 얼마씩 내야 할 것인지, 이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을 둘러싸고 명절 때마다 고성이 오갔다고 했다.
◆무의식적인 피해의식 탓도
이런 가족 사이 갈등의 이면에는 무의식적인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연봉 이야기가 나오면 "월급이 쥐꼬리 만해서 먹고살기 힘들다"며 푸념을 하면서도 친척이 같은 물음을 하면 기분부터 상한다는 것. 이유는 알게 모르게 머릿속에 감춰진 경쟁의식과 피해의식 때문이다. 비슷한 처지인 친구들과 달리 친척들이 "돈은 잘 버냐?"고 물었을 때 은근히 부모님을 포함한 자기 가족 전체에 대한 물음으로 인식하고 이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아울러 친척이라는 이유로 남들에게도 조심스런 질문을 쉽사리 던지는 것도 문제다. 복학해서 졸업을 앞둔 대학생 임모(25) 씨는 오히려 친척들이 가시 돋친 질문을 한다고 섭섭해했다. "혀만 차지 않을 뿐 '졸업하면 뭐 할거냐' '그 대학 나와서 대기업 입사는 어렵지 않으냐' '눈높이를 낮추는 게 어떠냐'고 말하는데, 걱정이 아니라 놀린다는 기분마저 들었죠."
비록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지만 일가친척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다면 다르겠지만 대부분 진심으로 걱정해서 건네는 말일 터. 문제는 늘 마주하는 가족과 달리 친척은 깊은 속내를 알 수도 없고, 행여 감정이 상해도 다시 풀 기회가 없다. 이 때문에 상처가 될 말은 미리 피하는 것이 최선.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쉽지 않을 텐데"라고 말하기보다는 "넌 능력이 충분해. 잘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는 게 좋다.
친척에게서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들었다면, 화를 내기에 앞서 스스로 한번 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잘 되면 두고보자'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말만 하고 있어'라는 식의 반응보다는 물음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서 "노력하고 있으니 잘 될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라며 스스로 응원할 필요가 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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