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장수 장안산

백두대간'호남정맥 가르는 산상 터미널…빨치산 상흔 서려

'무진장'(無盡藏)의 사전적 의미는 '다함이 없는 창고'. '재물과 보화가 넘쳐나는 곳'의 뜻이다. 지리적으로 '무진장'(茂鎭長)은 전북의 무주'진안'장수를 합쳐서 부르는 말. 이들 지역이 호남 내륙의 산간지역에 위치한 탓에 우리나라 오지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한다.

무주 덕유산, 진안 마이산, 장수 장안산. 세 곳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명산을 하나씩 끼고 있다. 덕유, 마이산은 이미 전국 명산의 반열에 들었고 '한국의 산하' 명산 순위에도 4위, 18위에 랭크되어 있다. 두 산의 위상에 비해 장안산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인지도에서 떨어지고 100대 명산에도 겨우 턱걸이(98위)했을 정도. 그러나 장안산은 백두대간 지리산과 호남정맥을 연결해주는 산맥의 환승지이자 산상(山上) 터미널이다. 이런 위상 때문에 장안산은 우리나라 8대 종산(宗山) 중 호남의 종산으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간과 정맥의 분기점, 장안산은 산꾼들의 필수코스=호남정맥은 장안산에서 산맥을 일으켜 마이산,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으로 힘차게 요동친다. 조계산에서 잠시 숨을 고른 산맥은 광양 백운산에서 남해에 몸을 던지며 산맥을 마감한다. 정맥 줄기를 따라 섬진강, 만경강, 영산강, 탐진강 등 호남의 주요 강 길을 펼쳐 놓는다. 대간과 정맥의 교차로라 하여 산꾼들 사이에서는 필수코스로 여겨진다.

장안산은 의기(義氣)를 품은 산이다.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장계면에는 임진왜란 때 의기(義妓)였던 주논개(朱論介)의 생가 터가 있었다. 논개는 1593년 2차 진주성전투 때 촉석루에 잠입했다. 기생으로 가장한 논개는 왜군의 승전연회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남강으로 유인해 동반 투신했다. 이름하여 십지결환(十指結環), 가냘픈 여인의 손에 10개의 반지는 적장의 숨을 끊는 병기(兵器)였던 것이다.

해방군, 좌익분자, 공비, 인민전사….

아직 '진행 중인 역사'이기에 빨치산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장안산은 빨치산의 전북도당의 중요 거점. 전설적인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의 지휘 하에 있었다. 1951~52년 공비대토벌 작전 때 장안산은 군인, 경찰의 주요 작전지역이었다. 산맥의 흐름상 덕유'지리'회문산과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1951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2일까지 벌어진 '장안산 전투'는 빨치산 주력의 명맥(命脈)을 끊은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인연인지 영화 '남부군'에서 빨치산 부대의 목욕 장면을 찍을 때 이곳 덕산계곡에 세트장을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 오지의 대명사 오명 벗고 교통도시로 부상=이곳 장수에서 벌어진 동족 간의 대립, 빨치산의 슬픈 역사도 따지고 보면 지역적 고립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이에 대한 보상일까. 최근 장수는 교통도시로 새롭게 도시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88고속도로가 장수를 지나고 대전-장수고속도로, 익산-장수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호남의 교통요지로 부상했다.

장안산 산행은 보통 무령고개~억새능선~정상에서 남서릉을 거쳐 범연동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인기가 높다.

오늘 등산의 출발점 무령고개는 백두대간의 줄기인 영취산과 호남정맥 출발점 장안산이 만나는 분기점. 이 고개를 경계로 두 산맥은 맥을 비껴간다.

장안산은 높이 1,237m로 부근에서는 덕유산 다음으로 높다. 초보 산꾼들에겐 조금 부담스러울수도 있지만 무령고개가 800고지이기 때문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일행을 태우고 온 버스를 하산점 범연동으로 내려 보내고 일행은 정상을 향해 오른다. 산행 초입에 팔각정과 만난다. 이 정자는 대간과 정맥을 한자리서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

오늘은 안개가 짙다. 두 산맥의 위용을 마음속으로 새겨본다. 팔각정에서 잠시 머문 일행은 다시 안개 속을 향해 스틱을 내딛는다. 마침 안개비까지 내려 운치를 더해준다. 조망을 날려버린 상실감을 보상해주려는 자연의 배려인 듯.

급경사를 30분쯤 오르자 이제 산은 작은 능선 하나를 펼쳐보인다. 순간 눈앞에 전개되는 녹색 파노라마. 억새밭이었다.

억새들은 이제 막 꽃술을 밀어올리며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안산 억새는 밀양 재약산이나 신불'간월산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억새길이 변화가 많은 것이 특징. 사자평이나 신불평원이 면(面)과 집적의 미(美)라면 무룡평원은 선적(線的) 아름다움이다. 이 억새능선은 여름엔 신록의 융단으로, 가을엔 하얀 꽃술의 파노라마로 등산객들을 불러들인다.

억새능선을 지나 푹신한 흙길을 1시간쯤 지나면 오늘 산행의 정상 상봉이 나타난다. 커다란 공터에 덩치 큰 정상석. 크게 특징이 없는 정상 풍경이다. 맑은 날에는 북쪽 능선 뒤로 덕유산이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다시 일행은 중봉과 하봉을 거쳐 어치재로 향한다. 긴장을 유지하며 날카롭게 서있던 능선들도 이젠 몸을 낮춘다. 어치재는 옛날 계남면과 번암면을 이어주는 산 속 교통로. 지금은 봇짐을 멘 상인이나 나그네를 대신해 원색의 등산복 물결이 바삐 재를 넘나들고 있다.

◆'긴 물줄기' 지명처럼 산자락 곳곳에 물줄기 뻗쳐=장수는 '긴 물'이라는 지명처럼 많은 물줄기를 내보낸다. 계남'계북'장계'천천(天川) 등 지명도 물과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다.

어치재에서 일행은 범연동 덕산계곡으로 향한다. 이제 산은 키를 낮추고 나무도 그늘을 드리워 산객들의 여독을 풀어준다.

어느덧 차 소리가 들려온다. 종점이 가까워 왔다는 신호다. 그 유명한 덕산계곡은 바로 도로 옆에 있었다. 옅지도 깊지도 않은 계곡, 사람들이 놀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일행은 모두 계곡으로 뛰어들어 흙길에 얼룩진 땀을 씻어낸다.

여름 끝자락, 피서객들은 이제 계곡에서 떠나고 산꾼들의 물장구소리만이 계곡을 울린다. 등산객들의 수다 너머로 빨치산들의 목욕 장면이 오버랩된다. 산에는 물이 지천으로 있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현장에서 빨치산들에게 위생은 사치였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 씨는 남녀가 산속에서 같이 뒹굴었지만 성(性)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고 산에 내려와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서 신음한 빨치산들. 그들에게 산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死線)이었을 뿐이다. 정지영 감독의 목욕신은 빨치산들이 산사람에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 정화'세례 의식이었다. 이들이 더 이상 광기어린 집단이나 이념의 동물이 아닌 그저 씻고 천진난만하게 물놀이를 즐기는 하나의 인간으로 그려내려 했던 것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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