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⑫ 송일호 소설가의 김천 감천

지각 안하려 철로에 귀 대 보고 경부선 철교 앞만 보며 내달려

김천중학교 시절의 추억이 서린 감천 경부선 철교를 다시 찾았다. 매일 걸어서 다녔던 왕복 60리 등굣길. 지각을 면하려고 김천 큰 다리 대신 지름길인 이 철교를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다녔다. 기차가 어디쯤 오는지 철로에 귀를 대 보고는 내달리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절로 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김천중학교 시절의 추억이 서린 감천 경부선 철교를 다시 찾았다. 매일 걸어서 다녔던 왕복 60리 등굣길. 지각을 면하려고 김천 큰 다리 대신 지름길인 이 철교를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다녔다. 기차가 어디쯤 오는지 철로에 귀를 대 보고는 내달리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절로 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향인 김천시 감천면 무안리에 세워진 외할머니 금릉김씨 효녀비. 비문에는 순종 황제가 문경대신을 통해 하사했다고 적혀 있다. 이곳에 오면 어릴적 외할머니의 정이 절로 묻어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향인 김천시 감천면 무안리에 세워진 외할머니 금릉김씨 효녀비. 비문에는 순종 황제가 문경대신을 통해 하사했다고 적혀 있다. 이곳에 오면 어릴적 외할머니의 정이 절로 묻어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향 들판에 벼논에 들어선 시설하우스. 김천에는 참외와 방울 토마토 특작이 유명하다.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향 들판에 벼논에 들어선 시설하우스. 김천에는 참외와 방울 토마토 특작이 유명하다.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송일호 소설가·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송일호 소설가·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나의 고향을 가자면, 서울 가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김천 시내를 진입하기 전, 폭넓은 하천인 감천(甘川)을 만나게 된다. 이 감천을 따라 20리를 가면 3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큰골이란 동네가 나온다.

나는 불운한 시절에 태어났다. 일제 말기 일본은 탄압과 수탈이 극에 달했고, 어머니들은 모두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죄 없는 나도 어머니 배 속에서 굶기부터 먼저 배웠다.

왜놈 순사는 동리 개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놋그릇까지 구둣발로 짓이겨 뺏어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밥그릇, 숟가락, 심지어 단추까지 나무로 바뀌었다.

나는 어머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일호야- 일호야- 요놈의 이(蟲)가 귀밑에서 살살 긴다."

나는 부리나케 달려가 할머니가 가리키는 흰머리를 뒤집으면 영락없이 이를 잡을 수 있었다. 머릿니는 작고 까만 편이고, 옷엣니는 크고 통통한 편이다. 어쩌다 이를 놓치면 할머니는 그렇게 애통해 할 수 없었다. 공연히 할머니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하루종일 우울했다.

우리 집은 무안 1리, 2리, 3리 중에 유일하게 한 집뿐인 기와집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이 기와집인 것을 무척이나 긍지를 가졌다. 우리 집은 대지주 큰 부자는 아니고, 보릿고개 때 굶지 않고 쌀밥을 먹을 정도의 동네 부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우리 집이 형님이 서울로 대학에 다니고부터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그때는 국민 총생산 70달러도 되지 않는 너무나 가난한 시절, 아버지는 형님을 우리 면에서 처음 대학생으로 탄생시켰던 것이다. 형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돈이 되는 것은 다 내다 팔았다. 나중에는 소도 팔고, 밭도 팔았다. 특허 내어 공장한다고, 논도 팔고, 산도 팔고, 3할 이자의 고리대금에 한 번 걸리면 헤어나지를 못했다.

나는 해방된 첫해에 감천국민(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장가간 아이도 있었고, 앞가슴이 볼록한 처녀 아이도 있었다. 나는 항상 그들의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중에서 너무나 잔인하여 '무짜'라는 별명을 가진 이의 종이 되어 6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가 터졌다. 부풀어 오른 시체들이 여기저기 집단같이 흩어져 있고, 개가 팔다리를 물고 다녀도 누구 하나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 잠시도 비행기 폭격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 우리는 누가 이기든, 지든, 알 바 없고, 전쟁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곳곳에 부서진 대포와 대포알이 내 키보다 더 높이 쌓여 있다. 밤만 되면 우리는 불꽃놀이를 했다. 대포알을 물고 있는 탄피를 살살 두드리면 틈이 벌어지고 대포알을 뺄 수 있었다. 만약 터졌다 하면 몸둥이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탄피 속에는 담배 필터같이 노란 화약이 있다. 화약에 불을 지르면 화약이 10m 정도 튀어 오르면서 요사이 불꽃놀이 같이 소리를 내며 맹렬히 타오른다. 다 타고 나면 다음 차례가 들고 있는 화약을 부으면 그 열기로 화약이 다시 타오른다.

내 차례가 되었다. 화약이 빨리 타오르지 않아 꺼졌는가 보는 순간 화약불꽃이 내 얼굴을 때렸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은 당연하고 앞 이빨 두 개가 부러졌다. 장님이 되지 않은 것은 천운을 타고 났다고 모두가 말을 했다.

우리는 미군전투 지역도 샅샅이 뒤졌다. 우리가 찾는 것은 설탕이다. 국방색 은박지에 들어 있는 하얀 설탕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다. 어떤 것은 입에 털어 넣으면 매우 쓰다.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이 커피라는 것을 알았다.

개학을 하니 죽은 아이와 병신 된 아이들이 3분의 1은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공부했고, 6학년이 되어 입시준비도 했다. 두꺼운 중학입시 책 한 권을 무조건 외었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국가고시라는 시험을 쳐서 김천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난생 처음으로 2층 건물을 보고, 신기하여 아래위로 수십 번 오르내렸다.

왕복 60리를 매일 걸어다닌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 너무 무리였다. 어쩌다 달구지라도 얻어 타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학교가 늦으면 마라톤 선수같이 매일 뛰다시피 했다. 지름길은 경부선 철교밖에 없다. 철교에 귀를 대어보고, 위험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밑을 내려다보면 깊은 물이 지나간다. 식은땀이 저절로 흐른다. 만약 기차를 만나게 되면 침목 사이로 빨리 교각에 내리면 된다. 온몸에 땀투성이가 되어 학교에 겨우 도착하면 지각생은 학교 운동장을 두 바퀴 돌린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잠이 절로 온다. 키가 작아 맨 앞자리에 앉기 때문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여러 번 꾸지람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졸랐다. 형님 학비 때문에 가난할 대로 가난한 우리 집에 자전거를 사 주기에는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다.

2학년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사 주셨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고물 자전거는 자주 고장이 났다. 자전거가 고장이 나면 끌고 가야하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보다 더 못했다. 그때도 지각을 할 수밖에 없고, 운동장을 두 바퀴 돌아야 했다.

가을이었다. 잘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사과밭 주인은 국회의원이었다. 그때는 사과를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일이 아저씨는 잠깐 기다리라 해놓고, 개구멍으로 사과밭에 들어갔다. 사과밭에 들어간 아저씨는 흙빛이 되어 총알같이 달아났다. 죄 없는 나만 답삭 붙들렸다. 사과밭 관리인은 나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난생 이렇게 맞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하다. 나는 아무 죄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선배가 호랑이었다. 옆 동네 사는 선배가 내가 공납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며칠만 빌려달라고 윽박 질렀다. 며칠만 쓰고 준다는 공납금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공납금 미납자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딱한 사정을 부모님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갈 곳 없는 나는 좁은 김천을 방황할 수도 없었다. 생각해 낸 것이 감천철교 교각이었다. 교각 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기차가 지나가면 철교를 받치고 있는 교각은 몸이 흔들릴 정도로 심하게 움직였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기차의 소리는 귀가 멍 할 정도였다. 어찌된 일인지 지난 태풍 매미 때 그 교각이 무너졌다.

우리는 학교 갔다 오다 자주 멱을 감았다. 얕은 물에서 놀다가 깊은 물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도 점점 더 깊은 물 속에 빠지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살았다는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나를 살려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 없이 그 자리를 슬금슬금 피해 나왔다.

흙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자라왔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향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이제 고향은 먼 산에 나무하러 가지 않아도 지천에 나무가 있고, 학교 갔다 오기 바쁘게 꼴 뜯어라, 소먹이라, 쇠죽 끓이라는 명령이 경운기가 다 책임지고 있다. 아담한 현대식 건물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이 있다. 사과, 배, 자두, 포도, 수박, 참외, 토마도가 넓은 들 하얀 비닐하우스에서 일 년 내내 쏟아져 나온다. 살기 좋은 내 고향이 되었다. 갑자기 고향에 가보고 싶다. 이 길로 60리 길을 걷고, 고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내가 자가용을 타고, 이 길을 운전하고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길을 달리며 옛추억을 되새김질 해본다.

소설가'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