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를 손에 거머쥐는 순간은 변신의 초기 단계이다. 결코 물러서는 일은 없으리라, 전장에서 승리를 다짐하듯 비장한 눈빛으로 시동을 건다. 엔진소리가 울리면 조금 전까지 차문 밖에 있던 자신은 이제 막 무장한 갑옷 속에 쑤셔 넣고 오직 스피드레이서로서의 임무에 돌입한다. 천천히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에 진입하기 전까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음 단계로 변신을 준비한다.
드디어 출발이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빨간불, 파란불 따위에 연연해서는 안 될 일이다. 최단시간 내에 거리를 주파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그 어떤 차도 내 앞에 달리는 것을 허용해서는 아니 된다. 만일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되는 다른 차량이 앞을 가로막을 시에는 반드시 추격하여 그 정체를 확인하고 응징해야 마땅하다. 추격 레이싱 중이라도 창문을 내리고 목청을 한껏 높여 상대방은 들어보지도 못한 고품격 육두문자를 난사해주는 기본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설픈 여성 운전자는 제집으로 돌아가라고 엄중히 충고해 준다. 병아리 그림을 뒷유리창에 붙였다면 그런 애송이에게는 도로 위의 매서운 맛을 제대로 보여줘야 하리라. 앞서가는 방해물이 있지는 않은지 전후좌우를 수시로 살펴보는 일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클랙슨은 진군의 시작이요 행군의 나팔소리임을. 행여나 차안에서 주행에 방해가 되는 쓰레기가 발생될 때에는 과감히 창밖으로 투척하라. 끝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이빔을 쏘아 위엄을 과시하고 추격자들을 따돌려 마침내 승전가를 울려야 한다.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다. 격전지를 뒤로하고 위풍당당하게 목표지점에 들어선다.
시동이 꺼진다. 동시에 단단했던 무장이 해제되고 차문이 열린다. 숨겨두었던 본래의 모습을 꺼내 입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온화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옛 어른들은 혼자 잠을 자더라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게, 혼자 길을 가더라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게(獨寢不愧衾, 獨行不愧影'독침불괴금, 독행불괴영) 하라 하였다. 차 안에서 남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여 무법자처럼 행동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번호판을 내 얼굴이라 여긴다면 함부로 질주하지는 못하리라.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베일 뒤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운전대 앞에 앉기만 하면 차가 막히는 것은 도로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운전자들 때문이라고 쉽게 역정을 낸다. 자기 일은 다 잘 알아서 할 여성들에게 밥이나 하러 집으로 가라고 한다. 운전대는 그 앞에 앉기만 하면 난폭하게 만드는 자동변환 장치이던가. 가슴속에 작동제어 리모컨이라도 하나 달아야겠다. 나라를 구할 트랜스포머가 되지도 못할 일인데 자꾸 변신할 수는 없지 않겠나 해서다.
이미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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