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밤이 너무 환하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지금 내가 사는 이 도시의 밤은 밤이 아니다. 해가 지기도 전에 가로등이 켜지고 형형색색의 전등이 거리를 비춘다. 집 안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이 도시에서 해질 무렵의 적념(寂念)이나 칠흑 같은 어둠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실 갔다가 돌아오는 밤길에 종종 마주쳤던 그 허깨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가 강제 이주라도 시킨 걸까? 고샅고샅 환하니 허깨비가 살 수 없고, 허깨비 때문에 마실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들도 없다. 그럼에도 허깨비들의 죽음을 단지 가로등의 승리로 박수 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허깨비들만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환한 가로등 아래서는 별을 볼 수 없다. 어두워야 별이 보이고,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별이 뜬다.

어둠을 밀어낸 도시의 밤은 소란하다. 밤이 되면 거리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노래 가사처럼,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하지만, 이름 모를 욕망의 사연을 접고 각기 제 온 곳으로 돌아갈 즈음이면, 도시는 지친 몸을 누인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각기 "술잔에 떠 있는 한 개 섬"이 되어 제 온 곳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멀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는 슬프다. 심지어 팔랑개비처럼 가볍다. 시멘트로 지은 도시라고 생명이 없을까, 무릇 생명이 그 무게를 더하고 깊이를 더할 때는 캄캄한 잠이 필요하다. 시골 고추밭 주변 가로등을 밤새 켜두면 그 아래 고추가 익지 않는 것처럼, 도시도 그렇고 그 안의 사람이나 식물도 다르지 않다. 도시든 사람이든 식물이든 깊이는 어둠을 통하여 온다. 내적 성장은 언제나 '캄캄한 영혼의 밤'을 앞세운다.

불의 발명은 분명 인류 문명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일리 있다. 환한 가로등이 어두운 밤길의 불편함을 덜어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밤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는 불야성의 불은 이제 더 이상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재앙이다. 이미 수천 년 전 사람들도 원했던 '어둠에서 밝음으로'는 밤을 낮처럼 환하게 해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불야성을 이루자는 말이 아니라, 내면의 불이 환하게 빛나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밝음은 어둠을 자양분으로 자란다. 그래야 건강하다. 요즘처럼 어둠은 싫어라 하면서 환한 것만 좇는 한, 현묘한 밝음은 기대할 수 없다. 바깥이 환해질수록 오히려 안은 어두워지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2, 3세기 동안 우리가 맹신한 합리주의는 이 도시가, 그 안의 사람들이 '겉' 눈은 밝게 그러나 '안' 눈이 어두워지도록 부추겼다. 투명하고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을 이상으로 치는 합리주의는, 은밀하게 내려 가루분보다 미세하게, 아니 어쩌면 쿼크보다 더 미세하게 이 도시와 사람들을 감싸던 검은색 미립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성은 투명하다. 그러므로 얕다. 이런 점에서 합리주의는 애초부터 팔랑개비처럼 가벼운 문화를 잉태하고 있었다.

어둠을 수용하지 않는 한, 성숙도 없고 깊이도 없다. 어두워야 고추가 익는 것처럼, 어두워야 이 도시도 그 안의 사람들도 익을 수 있다. 씨앗이 캄캄한 땅속에 묻혀야 싹을 틔우고 잎을 내는 것처럼, 도시도 사람도 밤에는 어둠에 묻어두어야 건강하다. 어둠은 무조건 싫어하고 내쳐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환한 낮의 분주한 일상이 필요한 것처럼, 캄캄한 밤의 적막도 중요하다. 어둠은 평등하다. 너와 나의 구별을 허용치 않는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어둠의 미덕은 충분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여전히 이 시대의 통설이다. 권위적 이성과 그 억압으로부터 많은 것을 해방시켰다. 계몽주의적 거대담론과 엄숙주의로부터의 해방, 이성에 억눌렸던 감성의 해방, 특히 여성성의 해방은 인류문명사에 중요한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어둠이 불야성의 억압에서 벗어나 회복되지 않는 한, 이 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여전히 모더니즘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어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해방시킨 모든 것들의 거푸집이기 때문이다. 바깥 세계든 내면이든, 해체와 탈중심, 감성과 여성성이 싹을 틔우는 것은 어둠 속이다. 밤은 캄캄해야 한다. 어디 '청계천 고가도로'만 싸구려 시멘트문화의 산물이겠는가? 불야성은 원기 충만한 야성을 상실한, 이미 돌아서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이 시대의 에필로그인지도 모른다.

이거룡(선문대교수·요가학교리아슈람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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