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이름

어릴 적,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태웅이었다. 한자로 쓰면 泰雄인데 두 딸에 이어 귀한(?) 아들을 얻은 아버지가 곰처럼 튼튼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눈을 감으신 외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동 사무소의 출생신고 담당자는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한자를 기재했고 그 덕(?)에 태흥(泰興)이 되었다고 한다. 허나 누님들이나 어머님께서는 벌써 쉰의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태웅이라 불러 가끔은 그 이름이 오히려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태웅이나 태흥은 각기 다른 뜻을 지니고 있지만 한 사람을 지칭한다. 하지만 태웅은 그저 가족들 간에 소통의 개별성을 가질 뿐 태흥이라는 이름의 사회성 앞에 그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이름이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첫째,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 둘째, 사람의 성 아래에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는 말, 셋째, 사람의 성과 이름을 아울러 이르는 말 등으로 풀이되어 있다. 즉 이름이란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분하기 위한 개별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흔히들 이름값을 하라는 말들을 하곤 한다. 이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각각의 이름에 그 나름의 가치가 있어 그 가치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기는 것도 사람이 죽어 이름을 남기는 것도 모두 다 이름값을 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점점 익명성으로 치닫고 있다. 한 개인이 불특정 다수의 일원이 되어 개성을 잃고 평균화되는 익명성은 도시사회 대중화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이름을 숨긴다'는 뜻의 이 말은 조직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을 숨기고 대중의 일원이 되는 것을 요구받게 되는 것과 스스로 자신을 감추고 사회적 책임을 피하는 수단으로 삼게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네르바나 타진요 현상이 최근 나타나고 있는 안철수 신드롬과 겹쳐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바른 이름값에 대한 대중의 갈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태웅이든 태흥이든 그 이름이 가진 삶의 흔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으로 치닫고 말았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여전히 답할 수 없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매일 아침 읊조려보지만 잠자리에 들 때면 고개를 내젓기 일쑤다. 단 한 번도 마주한 적도 없고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 앞에 오늘이 이렇게 쓸쓸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태흥(미래 티엔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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