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39>영덕 7번국도 옛길

신라 화랑들도 오가며 심신수련…1천여년 동해안 교통의 중심

7번국도 영덕 구간은 신라시대 동해안 주요 역로인 북해통(北海通)으로, 당시 말과 마차가 통행하고 각종 생산
7번국도 영덕 구간은 신라시대 동해안 주요 역로인 북해통(北海通)으로, 당시 말과 마차가 통행하고 각종 생산'군수 물자가 이동하는 주요 교통망이었다. 발해까지 연결되는 사신들의 이동 경로이기도 했다. 영덕군 병곡면 7번국도.

경북 동해안의 대동맥으로 경주-포항-영덕-울진을 잇는 7번국도.

매일 많은 지역민들이 차량을 이용해 7번 국도를 오가지만,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이곳을 주요 교통망으로 이용해 온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7번국도 영덕구간은 1천여년 전부터 경북 동해안 일대 교통의 중심지로 많은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더욱더 없다.

물론 고려'조선시대 야사나 관찬지리서를 통한 산물이긴 하지만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7번국도 영덕구간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얽힌 역사가 풍부하다.

◆신라시대 동해안 주요 역로인 북해통(北海通)

신라 소지왕 9년(487년) 역로 첫 개설 후 왕경인 경주에서 각 지방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교통망 개설과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에도 중앙의 정령과 군수물자, 생산물 등을 경주-옛 백제'고구려 영토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역로 정비와 개설을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로 삼았다.

이 같은 시대적 필요성에서 나온 경주 중심의 교통망이 북해통과 염지통, 동해통, 해남통, 북요통 등 5개 대로로 말과 마차 운행이 가능했다.

이 중 영덕이 속한 북해통은 경주에서 형산강을 따라 안강-신광-흥해-청하-송라-영덕-영해-후포-평해-울진-강릉 등을 연결하는 구간이었다.

당시 동해안 지역의 중요 생산물이 북해통을 통해 경주로 운반되었고 대조영의 발해와도 연결, 수많은 사신이 오간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길이었다.

신라의 수많은 화랑도들도 이 길을 통해 오가며 심신을 수련한 것으로 추측된다.

북해통의 당시 중요도는 고려시대에 설치된 역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시대 남정면 남정리에는 남역, 영덕읍 화수리에는 주견역, 병고면 병곡리에는 병곡역이 설치됐다.

현재에도 특히 영덕-포항-경주 구간에 높은 산이 없는 완만한 도로임을 감안할 때 과거 신라-고려-조선시대에도 매우 편리한 교통로로 이용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 수로부인 헌화가 전설이 얽힌 바위산

포항에서 7번국도를 따라 영덕 경계선인 남정면 부경리의 경찰 검문소를 지나자마자, 영덕군에서 설치한 '영덕 로하스' 대형홍보간판을 끼고 좌회전해 500m 들어가면 부경온천이 있다.

부경온천 뒤편 골곡포(骨谷浦) 부근의 폭 1천여m'높이 200m가량의 병풍바위가 바로 헌화가 전설이 살아 숨쉬는 바위산이다.

당시 이 바위산 어딘가에 피어난 진달래를 수로부인은 원했고, 그것이 천년이 지난 지금 아름다운 전설이 된 것이다.

신라시대 성덕왕 때 수로부인은 당시 말과 마차가 다녔던 북해통을 따라 강릉태수로 임명된 남편 순정공의 부임지로 가고 있었다.

수로부인은 경주를 출발해 당시 대사찰이었던 신광의 법광사를 구경하고, 일정상 송라 내연산 보경사에서 숙박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날 오전 수로부인이 송라역을 출발해 경주를 떠난 후 바다가 처음으로 보이는 남정면 부경리 골곡포에서 점심을 먹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수로부인은 병풍바위에 핀 진달래를 남편과 하인들에게 "따 달라"고 했으나 "위험하다"며 아무도 꺾어 주지 않았다.

이때 홀연히 암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가뿐히 진달래를 꺾어 바치면서 한구절 헌화가를 올려 바친 것이다.

자줏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물론 헌화가 발상지를 인근 울진으로 보는 설도 있다.

하지만 향토사학가 이완섭(51) 전 영덕군의원은 "울진에는 과거 북해통이었던 역로 주변에 헌화가 발상지로 볼만한 병풍 바위산이 없다"며 "영덕-울진구간을 수도 없이 답사했으나 결국 헌화가 발상지는 영덕 부경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또 이 전 의원은 "수로부인이 헌화가를 들은 지 이틀 뒤 당시 토호나 도적으로 보이는 '해룡에게 붙잡혔다가 주민들의 도움으로 구출됐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볼 때 헌화가 발상지가 영덕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북해통의 이동 시간과 거리, 강릉태수의 세력권 등을 감안할 때 수로부인이 납치된 것이 울진지역으로 보여 결국 헌화가 발상지는 영덕이라는 설명이다.

지금도 봄이면 영덕군 남정면 부경리 병풍바위에는 진달래가 한껏 피어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또 이곳 남쪽 편에는 조선시대 삼남어사 박문수가 머물렀다는 '어사터'도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하룻밤이 신라의 운명이 바꾸었다

7번국도를 따라 남정면에서 북쪽으로 10㎞쯤 올라가면 강구대게촌 직전 오른쪽에 강구면 강구중고교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건너편 강구소방파출소 인근에 있는 강구면 오포 1리의 괘방산(掛榜山), 일명 나비산 밑에서 931년 음력 2월에 태조 왕건이 하룻밤을 잤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시대 1530년에 만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돼 있다.

당시 왕건은 927년 대구 팔공산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대패했으나 930년 초 안동 병산전투에서 대승하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때 병산전투에서 큰 도움을 준 이가 영덕'영해를 기반으로 한 재암성주 선필장군이었다.

왕건은 당시 전쟁 없이 신라를 고려에 복속시키길 원했으나 경주의 일부 왕족과 귀족들의 반대에 부닥쳤다고 한다.

이에 왕건은 경주를 방문, 반대 왕족과 귀족들에 대한 정치적인 설득작업이 절실했다.

하지만 많은 군사를 대동해 경주를 방문할 경우 신라인들의 반발 내지 거부감이 우려된 반면 호위 군사가 적을 경우 왕건 본인에 대한 안전이 위협됐다.

결국 왕건은 개성 출신 최정예 기마호위병 50명을 이끌고 안동-영양-영해를 거쳐 선필장군의 본거지인 강구에 도착하게 된다.

안동에서 경주까지 최단거리인 안동-포항 기계 길은 후백제 견훤과 반 왕건세력인 일부 신라군이 산재한 이유로 피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해상세력이었던 왕건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수군을 강구항에 주둔시킨 후 괘방산에서 숙박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괘방산은 오십천의 탁 트인 강구 부근이어서 적의 습격을 방어하기 쉽고 유사시 수군의 도움을 받아 도피가 용이하다.

왕건은 이곳에 묵으면서 말을 타고 북해통을 달릴 경우 반나절 거리인 경주에 사신과 정찰대를 보내 신라 왕실의 분위기와 적군 매복 여부를 탐색했을 것이다.

또 왕건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선필장군에게 많은 정치적 문제에 대해 자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왕건은 여러 가지 정치적'군사적 아유로 영덕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후 왕건은 경주를 방문해 한동안 머무르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고 4년 뒤인 935년 신라를 복속하게 된다.

이 같은 내용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적 자료도 있다.

'고려사'와 '삼국사기'에 왕건이 신라 경순왕 때 경주를 방문한 내용이 나오지만 구체적인 이동경로는 나와 있지 않다.

또 조선시대 중기 때 만든 '신증동국여지승'에는 932년 왕건이 포항 인근의 신광면에 와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역사자료들이 사건 발생 후 수백년이 흐른 뒤 만들어졌음을 감안할 때 이 같은 내용들이 바로 '왕건의 숨막히는 영덕에서의 하룻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과 영덕대게에 얽힌 뒷얘기도 있다.

왕건이 영덕에서 묵었을 당시 지역민들은 고려왕에게 특산품인 영덕대게를 대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수봉이 지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왕건의 본거지인 황해도에서는 게를 '언기'로 부른다는 것.

영덕 사투리는 어느를 언으로, 게를 기로 말한다.

향토사학가 이완섭 씨는 "언기의 유래가, 왕건이 영덕에서 하룻밤을 묵을 당시 영덕사람들이 언(어느) 기(게)를 대접할까? 언 기가 좋을까?라는 표현을 한 것이 왕건 심복들의 입을 타고 전해져 황해도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왕건이 영해지역의 고개를 넘으면서 너무 피곤해 졸다가 영해부의 관리가 가져다 준 막걸리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말 의병장이 강물로 뛰어들어 순절한 뼈아픈 역사

강구에서 다시 7번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5㎞가량 이동해 오른쪽 영덕읍 진입도로를 이용하면 영덕경찰서 앞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직진해 영덕교회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사찰 명삼사가 위치해 있는데, 이곳 인근 강가에 있는 바위 호호대(浩浩臺)가 바로 조선말 의병장 김하락(金河洛) 장군이 관'일군과 전투를 벌이다 강으로 투신한 장소다.

의성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고 있던 김하락 장군은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동지들과 함께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관군 100여 명을 징발, 의병군을 만들게 된다.

이어 김하락 장군은 안성, 광주 등지의 의병과 연합해 관'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그해 12월 적의 반격으로 근거지인 이현을 빼앗기게 된다.

김하락 장군은 1896년 1월 다시 의병군을 정비해 남한산성을 점령했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김화락 장군은 본거지를 영남지방으로 옮기기 위해 그해 7월 영덕으로 와 남정면 장사리 모래사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동대산-도천을 거쳐 영해로 가려다 호호대 일대에서 관'일군과 맞붙게 된다.

당시 관'일군은 김하락 장군 의병대의 이동 경로를 짐작하고 군인 300여 명을 강길인 오십천과 청하 방면 육로로 나눠 추격전을 벌였던 것.

적에게 포위된 김하락 장군은 적군의 총탄을 두 방 맞고는 강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적군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물고기 밥이 되겠다"는 말은 지금도 영덕군민들에게 뼈저린 역사의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덕'박진홍기자 pj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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