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우의 노거수와 사람들] 의병장 황경림과 대구 동구 동내동 느티나무

충정 깃든 나무, 돌보는 사람 없이 홀로…

땅이름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따라서 함부로 바꾸거나 잘못 불러서도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성구의 내곶(관)동(內串洞)이 대흥동(大興洞)으로, 달서구 파산동(巴山洞)이 호산동으로 바뀌었다. 전자는 곶(串)자가 근심 또는 병 환(患)자와 비슷해서 내환(內患)으로 읽는 사람이 많고, 후자는 기업 활동의 최악을 의미하는 파산(破産)과 발음이 같다고 해서였다. 이름이 바뀐 후 마을이 발전하고 기업이 얼마나 활황을 보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어쨌든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단풍이 짙게 물든 가을날 오후 대구시 동구 동내동(東內洞)을 찾았다. 나말(羅末) 한반도의 패권(覇權)을 놓고 왕건과 견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초례산과 임란 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으로 활동했던 면와(勉窩) 황경림(黃慶霖'1561~1625)이 심은 느티나무와 그가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던 승방재(勝芳齋)을 보기 위해서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하양현 산천 조에 의하면 초례산은 '재현서이십리 고려태조정견훤우동수 등차산제천고잉명위'(在縣西二十里 高麗太祖征甄萱于桐藪 登此山祭天故仍名爲) 즉 '현의 서쪽 20리에 있음, 고려 태조가 동수에서 견훤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했다.

'하양읍지'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어 초례산이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싸울 때 왕건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잘못된 제보로, 산 이름 초례(醮禮)를 고려 태조 왕건이 혼례(婚禮)를 치른 곳이라 하고, 의병장이었던 면와가 은거했던 승방재를 왕건이 28번째 부인을 맞은 초례청(醮禮廳)이었다고 오보(誤報)를 해서 다시 한 번 현장을 살펴 시정하려는 의도였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초례산은 지묘동과 파군재 일대에서 패퇴한 왕건이 살아남은 병사를 모아 다시 견훤과 일전을 치르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데서 비롯되었으며, 승방재는 임란 시 지역에서 창의했던 황경림이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한 곳이다.

초례(醮禮)는 흔히 혼례에 쓰이는 단어이기는 하나 제단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 역시 초례라고 한다. 또 하나 가관인 것은 어떤 지도에는 서무례산(西無禮山)이라는 엉뚱한 이름도 등장한다. 대동여지도에 엄연히 초례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도 구청에서 나오는 지도, 안내판 등을 보면 산보다 격이 낮은 초례봉으로 부르고 있어 아쉽다. 더 이상 초례산이나 승방재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자료 정비가 시급하다.

면와 황경림은 명문 장수 황씨로 세종성대를 연 재상 황희(1363~1452)의 후예다.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신해(申海)와 함께 창의하여 향병을 이끌고 초례산, 금호강 등지의 전투에 참전했다. 후에 신해 뒤를 이어 의병장이 되었다. 권응수 진영에 들어가 영천성 탈환전투와 1596년(선조 29년) 팔공산회맹, 정유재란의 화왕산회맹에 참가하였으며, 1597년(선조 30년) 팔조령을 넘어온 적을 달성전투에서 패퇴시켰다.

공은 많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선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무라며 공적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왜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초례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승방재를 지어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했다. 현재 승방재 정비 등 면와 현창을 벌이고 있는 후손 황봉하 씨는 이 점이 아쉽다고 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려고 했다. 황봉하 씨가 승방재를 가보자고 했다. 걷기가 다소 불편해 면와를 기리는 동호사(東湖祠)만 보고 오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산을 오르려니 숨이 가빴다. 그러나 그의 정성에 못 이겨 발걸음을 옮겨 승방재에 다다랐다. 오랫동안 덤불 속에 가려져 있었으나 풀을 걷어내고 나무를 솎아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잘 보존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하여 산을 내려왔다. 5세기 전 공이 심은 느티나무처럼 후손들이 번창했다. 혁신도시에 포함되어 일가는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이 심은 나무 역시 돌보는 이 없어 관리상태가 엉망이었다. 건사하는 일이 시급하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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