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5부-소통과 변화의 수용 <5>통합과 애민의 리더십 선덕여왕

유신과 춘추 '비주류 人材' 발탁 등용…백성도 어머니 품처럼 감쌌다

"우리나라 고사에 비록 선덕'진덕 두 여왕이 있었으나 이는 '새벽의 암탉'(牝鷄之晨)과 같아서 가히 본받을 것이 되지 못한다."(헌안왕),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데 어찌 할머니들이 안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는 것을 용허하겠는가. 신라가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힌 것은 진실로 난세의 일이니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다."(고려 김부식), "네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주위 나라들이 무시하는 것인데 내가 나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신라왕을 삼되 혼자 가서 왕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 보호하고'''."(당 태종),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다. 그래서 이웃나라가 해치려는 것이다."(당 신인)

우리나라 왕조 사상 첫 여자 임금에 올랐던 신라 제27대 선덕(善德'?~647'재위 632~647)여왕. 그는 뒷날 제28대 진덕(眞德'?∼654년), 제51대 진성(眞聖'?~897)여왕의 탄생에 길을 텄다. 신라 56왕, 백제 31왕, 고구려 28왕, 고려 34왕, 조선 27왕을 통틀어 첫 여왕이었다. 하지만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 다시 평가받는 선덕여왕의 리더십

시인 김지하는 '선덕여왕'이란 시에서 "선덕여왕 역시 네오 르네상스의 첫 발자욱이다''' 이제껏 우리가 민족 주체성 중심의 역사만 생각하다 보니 고구려사만을 제일로 알았다. 그런데 신라사가 튀어나왔다. 시대가 변한 것"이라 했다. 또 "나만 아니라 모두들 그렇다. 이제껏 신라사는 우습게, 고구려사는 굉장하게 여겼다. 식민시대에 주체와 저항과 대륙과 다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젠 신라가 달떠오른다''' 선덕여왕을 새로운 시대의 첫 샘물로 여긴다. 개벽의 첫 조짐 애기달이다"고 노래했다.

선덕여왕의 리더십을 조명하고 새롭게 평가하는 움직임들이 TV드라마와 소설, 강좌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왕은 새로운 지폐인 5만원권의 인물 주인공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방치됐던 여왕릉 주변 정비와 그의 죽음 예언과 관련된 사천왕사터 발굴작업, 연구논문 발간 등도 이어지고 있다.

여왕의 리더십 등을 배우는 계명대학교의 여성 리더십 교육과정도 그 한 예이다. 지난해 3월부터 올 연말까지 4기(각 11주)에 걸쳐 실시되고 있는 미래 여성리더 양성 프로그램인 이 과정에는 대구'경북'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 30명의 비영리기구(Non Profit Organization'NPO) 근무자들이 참가하며 교육기간 중 여왕릉을 꼭 찾는다.

프로그램을 맡은 계명대 여성학과 조주현 교수는 "이달 21일 개강한 제4기까지 120명이 참가했다"며 "인기있는 것이 선덕여왕릉을 찾아 여왕의 리더십과 예지력 등 여왕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문화체험"이라 소개했다.

이들은 또 여왕의 사연이 서린 분황사, 황룡사터, 흥륜사터, 영묘사터, 사천왕사터 등지를 돌며 통일 전 국난기에 나라를 다스렸던 여왕의 리더십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내일의 여성 지도자상을 설계하게 된다고 조 교수는 덧붙였다.

교육생들의 '선덕여왕 발자취 밟기' 등 문화체험을 맡은 이정옥 전 위덕대 교수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고 여성지위가 향상되면서 선덕여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의 인재발탁 및 활용능력, 문화에 바탕을 둔 국난 극복 및 통치력 발휘 등이 조명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재를 키우고 발굴, 등용한 통합의 리더십

지난해 퇴임한 이화여대 이배용 전 총장은 "나는 최고 리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신라의 선덕여왕과 한글을 창제해 오늘날 민족 자존심과 문화를 높인 조선 세종대왕을 꼽는다"고 취임(2006년) 뒤 밝혔다. 2005년 지은 자신의 책에서도 선덕여왕을 '삼국통일의 길을 닦은 지도자'로 평가했다.

여왕의 인재 발굴 및 등용의 안목, 통합 및 덕치의 리더십은 시대를 초월한 지도자의 뛰어난 덕목으로 손꼽히고 있다. 왕족 자제들을 중국 교육기관인 국감(國監)에 보내 교육받도록 하는 등 인재 양성에 관심을 두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비 유학생을 당나라에 보낸 셈.

또 패망한 가락국 후손 김유신(金庾信)과 비주류의 진골 출신 김춘추(金春秋)를 발탁, 등용한 리더십은 본받을 만한 덕목이다. "왕의 지지세력은 김춘추와 김유신"이라 한 경북대 주보돈 교수의 지적처럼 두 사람은 충성을 다했다. 사위, 딸, 손자를 백제군에 잃은 김춘추는 적국 고구려에서 투옥되면서까지 외교전을 펼치고 일본'중국도 찾아 지원을 요청하는 등 생사를 넘나들며 충성했다.

김유신 역시 몸을 아끼지 않았다. 계속되는 백제 침공에 "존망이 공의 한몸에 매였으니 수고를 꺼리지 말고 부디 가서 해결하오"라는 여왕의 말에 집앞을 지나면서도 가족을 만나지 않고 전쟁터로 향했다. 김유신은 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毗曇) 등이 '여자 임금은 안된다'(女主不能善理)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 위기의 신라를 구했다.

"나는 공(김유신)과 함께 한 몸으로 나라의 고굉(股肱'임금이 가장 믿는 신하)이 되었다"는 김춘추의 말처럼 통일의 일등공신인 두 사람의 충성은 여왕의 인재 발탁 및 등용, 포용의 리더십 결과였다.

'인평'(仁平)이란 독자 연호도 반포해 자주 국가임을 알리는 당당한 지도력을 보인 여왕은 당(唐)의 견제 속에서도 유연한 외교력으로 당의 군사 지원을 이끌어내는 등 통일 초석을 다졌다. 그의 통치 리더십 덕분에 뒷날 진덕과 진성여왕의 즉위도 가능했으리라.

경희대 하영애 교수는 논문에서 "선덕여왕은 '여주불능'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라를 안정적 단계로 끌어올린 능력과 군신 간의 신의와 덕치의 리더십을 갖춘 여왕이었다"고 진단했다.

한편 16년간 재위한 여왕의 인재 발굴 및 등용의 리더십, 불교에 대한 관심은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로 당나라를 주(周)로 국호를 바꿔 16년간 통치한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재위 690~705)의 인재 등용과 불교 중흥 정책 등의 통치방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불교에 관심 쏟은 지혜의 리더십

"당장 먹을 것이 없어 항의하는 것은 폭동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생존이라 부릅니다. 새주(璽主'임금의 옥새를 관리하는 사람)께서 나라의 주인이었다면 백성을 자기 아기처럼 여겼을 터''' 하나 주인이 아니시니''' 늘 야단치고 늘 통제하고''' 주인이 아닌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한 꿈을, 백성을 위한 꿈을 꾸겠습니까?"

TV 드라마 '선덕여왕'(2009년)에서 선덕여왕(덕만)이 상대역인 새주 미실(美室)과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다. 위작(僞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지만 여왕의 한 모습으로 추정하면 억측일까.

여왕의 백성 사랑과 인간적인 모습은 기록에도 있다. 여왕은 겨울에 각 지방에 사자를 보내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인 환과고독(鰥寡孤獨)을 구휼하도록 했다. 대사령을 내리고 주'군의 1년간 잡세도 면제시켰다. 여왕을 사모해 병이 든 지귀(志鬼)란 역졸을 위해 영묘사에서 그를 만나려 했고, 김유신이 여동생(문희)을 불에 태워 죽이려 할 때 구하도록 하고 김춘추와 결혼토록 했다. 첨성대도 천문을 이용, 농업에 활용하여 백성에게 도움 주려는 배려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백성 사랑은 불교의 자비심 때문이었을까. 선덕여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황룡사(皇龍寺) 9층 탑을 세워 이민족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 '향기로운 임금(芬皇)의 절'이란 의미의 분황사(芬皇寺)를 비롯해 25개의 절을 지었다. 아플 때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고승 100명이 설법하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872년 경문왕 때 황룡사탑 중수 후 남긴 황룡사찰주본기에 "(선덕여왕)14년에 건축을 시작하고''' 탑 기둥을 세우고 이듬해 완성하니''' 과연 삼한을 통합하였고 군신이 안락함은 지금까지 그것에 힘입음이다"란 기록은 그래서 남았을까.

여왕의 지혜는 지기삼사(知幾三事) 기록(삼국유사)이 증명하고 있다. 당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향기 없음을 알았고, 한겨울 개구리 울음소리에 백제군의 여근곡(女根谷) 침입 사실을 알고 물리치게 했다. 죽은 뒤 도리천(忉利天'불교의 하늘세계)에 묻힐 것이란 예언도 후일 무덤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짐으로써 맞아떨어졌다(불경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관인명민'(寬仁明敏'너그럽고 인자하고 현명하며 감각 있다는 뜻)과 '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신성한 황제 혈통을 이은 여인이란 의미의 존호)라 했다'는 기록은 여왕의 치적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정인열 논설위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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