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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축구공 선물이 인생 바꾸었죠"…김기진 계명대 체육학과 교수

골프만 제외하고 온갖 구기종목에 능한 김기진 계명대 교수가 교내 실내체육관에서 배드민턴 채를 잡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사진
골프만 제외하고 온갖 구기종목에 능한 김기진 계명대 교수가 교내 실내체육관에서 배드민턴 채를 잡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학과장실과 연구실을 오가며 연구하고 있는 김기진 교수.
학과장실과 연구실을 오가며 연구하고 있는 김기진 교수.

'내 별명: 아이젠하워 또는 헨리 키신저'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 이같이 어마어마한 별명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오렌지색 머리와 큰 코 등 외모탓에 붙은 별명이다.

존경하는 위인은 더 거창하다. 영국의 처칠과 미국 링컨이다. 어릴 적 이들의 위인전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았고, 항상 누구에게든 스스로 삶을 결정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 별명을 가진 사람에 대해 옆길로 조금 더 세면, 공으로 하는 모든 종목을 소화하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약간 '농땡이'(?) 기질도 있었다. 일찍 시작한 당구는 상당한 수준('300'을 훌쩍 넘음) 이며, 탁구'테니스'배드민턴'필드하키'축구'육상 등 못하는 운동이 거의 없다. 단, 골프만 가족과 일을 위해 잠시 미뤄뒀다.

경북대 체육교육학과 학생 및 석사 과정 시절에는 아예 필드하키 대표선수로 5년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센터포드(공격수)에 팀 주장까지 맡으며 전국체전에 나가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바 있다. 국가대표까지 꿈꿨다고 하니 상당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음이 짐작 가능하다.

그는 1992년 몬주익의 영웅,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와도 막역하다. 황 선수가 아무 연고도 없는계명대 홍보대사가 된 것도 바로 이 사람 때문이다. 그의 방에는 당시 황영조의 발을 본뜬 부조상이 있다. 지난주에도 만났으며, 언제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그런 사이다.

이번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언론사 자문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대구FC 프로축구단 이사 및 자문교수도 맡고 있다. 장황하게 설명한 이 인물은 바로 계명대 체육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는 김기진(金奇珍 · 53· '기이한 보배'(외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교수다. 1958년생 개띠인 김 교수 집안에는 벌써 장녀(현지)가 시집을 가 돌이 지난 손자를 봤는데, 막내아들(상혁)은 건축가를 꿈꾸는 고3이다. 큰아들(상훈)은 서울대 불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부인은 100점 만점에 150점(50점은 보너스 점수)을 줘도 될 정도의 고마운 존재인 김희년 씨다.

◆생일선물이 인생행로를 바꾸다

1958년 2월 23일 대구시 북구 칠성동 기찻길 옆에서 삶의 첫발을 내딛은 김기진은 신암초등학교 1'2학년 시절에는 전체 20반이나 되는 많은 학생 중 전교 1등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에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초교 4학년 때 사준 축구공(고무로 만든 공)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부를 꽤 잘했던 소년은 구기종목에 빠져들었고, 최상위권 성적은 상위권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축구, 핸드볼 등에 소질을 보인 그는 경복중학교와 대건고 시절에도 운동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다. 운동에 대한 재능을 본 체육교사는 그에게 경북대 사범대학 체육학과 진학을 권유했고, 그는 단방에 합격했다. 그리고는 경북대 필드하키 선수로 뛰면서 체육학 석사까지 마쳤다.

"인생에는 터닝 포인트나 계기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초교 1'2학년 시절 보인 공부에 대한 재능을 운동이나 체육계에서 활용해 날개를 펼치라는 뜻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후 김기진의 삶은 운명이 정해준 행로를 따라 흘러갔다. 경북 의성점곡중'고교 교사로, 그리고 경북대 강사로 활동하다 1987년부터 스포츠과학연구소 연구원이 됐다. 이후 한국체육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되면서 10년 동안 스포츠 관련 연구에 온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1996년 봄, 새 직장이자 평생직장이 된 곳이 바로 계명대 체육학과 교수직이었다. 김기진은 이후 15년 동안 대구경북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해결할 과제가 있는 경우에는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자지 않는다고 한다. 석'박사 과정에 있는 그의 제자들과 주변 학계 인사들도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과 체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제가 운동을 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모든 과정에서 스포츠맨답게 페어 플레이 정신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맥이나 학맥보다는 일에 대한 열정과 그 성과가 더 중요하니까요."

◆2011 세계육상 이후에도 방향 제시

김기진은 체육의 '팔방훈남'답게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언론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시민들이 육상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줬다. 육상을 관전하는 포인트를 쉽고 상세하게 소개해 지역민은 물론 전 국민에게 육상 관전의 지평을 열어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민들 스스로 큰일을 해냈습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대구의 브랜드가 전 세계에 알려졌고, 이를 토대로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한 단계 도약해야 합니다. 대구 육상대회 성공이 한국이 세계 스포츠 10대 강국으로 불리는 데 손색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육상도 분명 한 단계 도약할 것입니다."

그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남긴 것과 향후 과제 등을 연구하기 위해 지역뿐 아니라 전국을 돌며 세미나 및 심포지엄에 참여하고 있다.

김기진은 체육계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만큼 관련 인사들에 대한 미안함도 표시했다. "열심히 살아온 제 인생은 후회가 없지만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 '내가 조금 오버하지 않았나'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분야에 주제넘게 관여해 실수하지 않을까 조심하고 있지만 결국 체육학 분야에서 긍정적인 결과로 귀결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해 바랍니다."

이런 미안함은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르다. 20년 가까이 새벽 1, 2시까지 연구실 불을 밝히며, 오직 일에만 매진해 온 결과인 것. 그는 대한하키협회 기술분과위원, 대한육상경기연맹 스포츠과학위원, 마라톤 국가대표팀 스포츠 과학지원 담당 연구원 등을 지냈다. 현재도 대구시축구협회 부회장, 대구시체육회 이사, 대구FC 프로축구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이 밖에 한국체육학회 부회장, 스포츠 과학교실 강사 등 각종 학회 및 기타 활동은 이력서 한 페이지를 채우고도 남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구경기 때는 경기장 총괄 책임 역할을 맡아 월드컵경기 중 대구에서 열리는 경기의 원활한 진행을 이끈 경력도 갖고 있다.

"지역 체육의 중심에서 버팀목 역할을 하며, 대구경북 체육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기진의 향후 행로이자 다짐이다.

권성훈기자 @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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