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저서 '심리학의 원리'에는 이런 글이 있다. "… 칸트에서는 사고와 서술이 모두 복잡한 것이 타고난 약점이었으며, 그것을 더욱 조장한 것은 그가 쾨니스베르크에 거주하여 생긴 고루한… ."
임마누엘 칸트는 80년 생애 동안 고향 쾨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었다. 쾨니스베르크는 그에게 단 하나뿐인 고향이자 정든 곳이었다. 칸트는 이 도시에 강한 애정을 가져, 다른 대학에서 훨씬 좋은 조건으로 초빙 제안을 해도 굳게 거절하였다. 그는 철학뿐 아니라 인간학과 법학, 지리 등도 강의했는데, 여행도 하지 않은 그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다리의 모양과 구조, 길이, 폭, 높이 등을 손에 잡힐 듯이 말했다고 한다. 시간에 맞춰 규칙적으로 생활하던 그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산책나가는 걸 잊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간을 알았는데 말이다.
◆외갓집 인교동과 우리 집 남산동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 중구. 중구에서 자라고 살았으며, 지금도 중구에 살고 있다. 1950년대 초반, 가정 분만을 하던 그 시절에, 나는 인교동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남산동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초등학교 2학년 때 (구)법원 옆 공평동으로 이사하였다. 내가 다녔던 경북대 사대부속 초등학교와 사대부중뿐 아니라 경북여고도 걸어서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범어네거리 남측 야산은 방학 때 식물채집이나 곤충채집을 하기위해 가던 곳이었다.
남산동 집은 대구초등학교 서편 골목 안에 있었는데, 저녁이면 지금의 하나은행 앞에서 엄마와 함께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길가에 '빨간 전등'이 달린 집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구멍가게였던 것 같다. "빨간불 집에 가자"면서 엄마를 졸라댔던 기억이 난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친구와 놀 줄도 장난칠 줄도 몰랐다. 나에게 학교는 신비로운 곳, 신성한 곳이었다. 공평동 집 골목을 벗어나면 눈앞에 바로 사대부초가 보였다. 4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2층에 있던 우리 교실이 직선거리로 보여서 교실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신기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후 10년 전후되는 시기였다. 미국에서 왔다는 덩어리로 된 배급 분유를 입안에서 침으로 녹여 먹었는데 달콤했던 우유향은 지금도 느껴진다. 학교에서 쪄주던 뜨거운 옥수수 빵도 아껴 먹고 싶었는지, 동생들과 나눠 먹었는지 기억엔 없지만 소중하게 들고 집으로 갔다.
◆공평동, 내 동무 영주
큰아버지가 약전골목에서 한의원을 하셨기 때문에 명절뿐 아니라 거의 매달 제사 때마다 큰아버지 '약방'에 갔다. 큰아버지는 한약재 향 속에서 옛 선비같이 앉아 계셨는데, 그 모습만 남아있고 말씀은 기억나지 않는다. 약을 써는 작두도 무서웠다.
친구들 집은 주로 지금의 대구백화점 인근에 있었다. 법원과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때는 상점보다 주택이 훨씬 더 많았다. 어릴 적 단짝 동무 영주랑은 놀다가 심심해지면 그 아이 외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중앙통 문화서점까지 달려가곤 했다. 우리 둘은 두 집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고 갔는데, 어린 우리가 뛰어다니던 그길이 지금은 20대의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그리운 부중시절, 그리고 봉산동의 미술학원
지금은 달구벌대로가 시원하게 뻗어있지만, 그땐 사대부중 앞길의 폭이 매우 좁았고, 청운아파트로 향하는 도로는 막혀 있었다. 학교 소사 아저씨께 양해(?)를 구하고 건너편 가게로 막 뛰어가서 사먹던 설익은 복숭아의 맛이란! 아이들은 신과일을 좋아한다.
등나무 건물에서 공부하던 때, 교실에 쥐가 나타나는 소동도 있었는데, 나는 무서워 책상 위로 올라가 버렸다. 아침 등교시간이면 교문 앞에서 덩치 큰 부고 대대장이 우리 꼬마 여중생에게도 거수경례를 해 줘 우린 으쓱해지면서 부중의 학생이란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일까? 학창시절 중에는 중학교 그때가 가장 그립다.
겨울방학에는 수성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크나큰 재미였는데,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스케이트를 들고 집을 나서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사실 못 가에는 뜨거운 코코아를 파는 리어카가 있고 군데군데 얼음도 녹아있어서 위험했다. '위험'을 모르는 게 아이 아닌가!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스릴'을 즐기고 싶어 하지 않은가!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들으면 의아해 하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봉산동에 있는 현대미술학원에서 데생과 수채화를 그리며 긴 저녁시간을 유유히 보냈다. 그렇게 그땐 아이들에게도 낭만이 있었다.
◆순박했던 사람들
우리가 크던 시절, 아이들은 모두 콧물을 훌쩍거렸다. 그중에 유난히 콧물이 많은 아이가 있어서 그 애의 별명은 '아이스케키', 지금은 미국에서 하이인텔리로 살고 있다. 또 그때의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뺨이 터서 빨갰다. 여섯 자녀들을 사진기에 담는 것이 취미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어릴 적의 사진을 많이 갖고 있는데, 겨울에 찍은 우리들 볼은 짙은 색이거나 빨갛다.
그때는 모두가 (경제적으로) 못 살았지만 아무도 자신이 힘들게 사는 줄을 못 느끼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형제들은 당연히 서로서로 도왔고 먼 친척들까지도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변호사 사무실과 살림집이 함께 있던 우리 집은 항상 대문이 열려 있어 걸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젊은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인심으로도 유명해서 설날이 되면 그들이 단체로 세배하러 왔다.
어린 내가 살던 대구는 한국의 3대 도시가 아니라, 2대 도시였다. 고등법원이 서울과 대구에만 있었으니까. 사건이 생기면 부산 사람들, 전라도 지역 사람들은 대구를 찾아왔다. 우리 집은 매일 사람들로 북적였고, 유명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공화당 창당 멤버까지 되셔서 점심때가 되면 마치 식당같이 수십 명이 함께 밥을 먹었다.
우리 세대는 전쟁 후의 한국 모습, 4'19, 5'16…. 여러 차례의 권력이동과 문화적 격변을 보고 느꼈다. 주요 도시 대구에서는 그 변화들이 눈에 보였다. 그 후 삼사십년, 세상도 많이 변하긴했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대구에서 한국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세계적 변화는 알 수가 있다. 세계인이 책을 공유하므로. 이는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국가가 변모했듯이 고향도 그만큼 변했으면 애정이 덜 갈지도 모르겠다. 이삼십년간 대구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래서 좀 복잡했다. 부모가 잘 풀리지 않은 자식에게 애틋함이 더 가듯….
팔십 후반이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평동 옛날 집에 아직도 사신다. 6남매의 사진과 통지표, 동요 부르던 테이프까지 지니고…. 그런 것을 차마 버릴 수가 없으니 아파트로 갈 수 없으셨을 것이다.
부모님의 나이를 따라가다가 이순(耳順)이 된 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습관같이 내가 자라고 살던 곳을 산책한다. '귀로 들어 넘길 수 있는 나이'에 '무심'(無心)하게. 'happiness'의 의미는 '평온함'이다.
박소경 경산1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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