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를 보고 있던 중이다. 할머니 한 분이 황급히 진료실로 들어오신다. 깜짝 놀라 잠깐 멍한 상태로 바라본다. 쭈글쭈글한 눈가는 물기로 짓물러져 있고 벌겋게 변해 있다. "다른 환자를 진료 중이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간호사가 진료실 밖으로 모시려고 한다. 약간 저항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내게 말한다. "할아버지가 며칠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날 아침까지 괜찮았는데 잠깐 밖에 나갔다 오니 숨이 없잖아요." 할머니가 훌쩍거린다. "담낭 수술할 때는 병실까지 찾아오셔서 돌봐주셨는데…. 그래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할아버지가 담낭 수술을 받을 때 찾아간 사실은 있다. 우리 과(科) 문제로 수술할 때 위험이 없는지 협진을 요청해서다. 할머니는 "아이고 교수님,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라는 말로, 말을 못하시는 할아버지는 "억, 억"하는 소리를 냄으로써 반가움을 표시했었다.
할아버지는 10여 년 전 뇌출혈을 일으켰던 환자다. 수술을 해드렸지만 식물상태보다 약간 나은 상태가 됐다. 말을 못하시고 식사, 세수, 대소변 처리도 할머니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가만히 계시면 그래도 모시기가 나았을 것 같다. "억, 억" 소리를 지르고 한쪽 팔을 휘두르며 자주 화를 내시곤 했다. 퇴원 후 할머니가 약을 타서 드리고 돌보아 왔다.
말이 10여 년이다. 짜증스럽고, 싫고, 어떤 때는 차라리 돌아가셨으면 하고 바랐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자식이 할아버지를 돌보아왔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정성 들여 모시고, 돌아가신 것을 눈가를 붉히며 안타까워하겠는가?
부부란 무엇인가? 신이 맺어주는 부모와 자식 간의 끈보다 더 질긴가?
주례를 선 경우가 있다. 학장을 할 때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졸업생이 타 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받을 때 결혼을 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공의가 되면 소속과의 교수나 과장이 주례를 서서 문제가 없으나 인턴 시절에는 소속과가 없으니 주례를 구하러 모교로 달려오곤 한다.
학장의 임무를 끝내고는 대부분 주례 요청을 거절했다. 할머니 같은 분들을 보면서 주례 서기가 겁이 나서였다. 주례를 거절해서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신이 만들어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보다도 더 숭고한 부부의 연(緣)을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맺어줄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누가 주례를 해야 하나? 목사님이나 신부님, 스님이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래도 그분들은 범인들보다는 조금은 신과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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