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추일서정(秋日抒情)

토요일 오후, 늦가을 햇살이 떨어진 은행잎들을 뒤적이고 있다. 근무를 마친 그는 며칠 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출퇴근용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신천대로를 달린다. 아름다운 햇살은 신천의 흐르는 물살에도 닿아 온통 은비늘이 되어 반짝거린다. 머리칼을 스치는 약간은 차가운 가을바람, 어디선가 풍겨오는 갓 구워낸 빵 냄새.

가끔 들르는 길모퉁이 찻집 청년이 계단을 쓸다가 손을 흔든다. 그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어디선가 희미한 피아노 소리, 아, 틀림없이 그 소녀가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늘 파리한 모습으로 창밖을 내려다보던 흰 회벽집의!

역시 소녀의 방 창은 빨간 제라늄 화분이 얹힌 채 열려 있다. 피아노 소리는 천천히 페달을 밟는 그의 뒷덜미를 가늘게 부딪치듯 뒤따라온다. 문득 그는 어제밤에 비디오로 본 영화의 장면을 떠올린다.

잉카의 한 마을을 조사하던 과학자들이 원주민 짐꾼들을 데리고 갔는데… 한참 길을 가던 원주민들이 멈춰 서서 움직이지를 않더라는 것. 과학자들이 원주민 대장에게 왜 멈추느냐고 화를 내자 '너무 빨리 걸어 우리의 영혼이 쫓아오질 못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는.

소녀의 피아노 소리가 마치 뒤에서 숨차게 따라오는 그의 영혼처럼 구르는 바퀴살의 회전 속도로 잦아든다. 텅 비고 긴 골목길로 접어든 그는 영혼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자전거를 멈춰 세운 채 연주를 듣는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가을 햇살도 한적한 담벽에 기대어 귀를 기울인다.

'…내 영혼은 초록 소나기, 초록 물소리를 맞느라 반딧불이처럼 분주하지요. 자박자박 내 영혼의 발자국 소리 들리지요. 파란 영혼 밑에는 생선가시의 하얀 등뼈도 보이지요. 초록 소나기 끝의 달은 파랗지요. 달이 보리밭에 엎드린 양철통 속에 들어가지요…'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그는 천천히 긴 골목을 자전거를 몰고 간다. 오늘은 소녀의 연주와 같은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물든 붉나무 잎이 툭 떨어진다. 언젠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자신이 태어나 살아온 이 도시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꼭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때를 위해 초록 소나기와 같은 영혼으로 시를 쓴 시인들의 시도 열심히 찾아놓으리라 또 생각한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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