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성천 물은 부드럽고 고요하게 흐른다. 상주인들의 심성 같다. 옛것을 지키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상주인들의 자세가 병성천 물과 같다.
누구는 말한다. 상주가 1931년 대전과 같이 읍이 되었으나, 아직 상주는 작은 도시고, 대전은 떡 벌어졌다고. 그러나 상주인들은 외형보다 더 큰 내면의 자부심을 갖고 산다. 선조들이 옛것을 지켜온 것이 단순히 새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이고 국수적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더 먼 날 인간이 살아가야 할 가치가 산업화에 있는 것이 아님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라 믿는다.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 쌀, 곶감, 누에 등 이름만 들어도 깔끔한 산물이다. 이 세 가지를 고대국가 시절부터 가꾸어 왔으니 그 질기고 은근하고 꼿꼿한 상주인들의 심성은 곧 병성천의 맑고 고운 물살이 빚어낸 빛깔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몇 번의 절망도 있었다. 도청을 놓치고, 혁신도시를 놓친 절망. 경주와 함께 근대 경상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이 땅이 어찌 이리도 초라한지 자성하고, 분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 땅을 가꾸고 지켜온 선조들의 혜안(慧眼)에 의하면 더 나은 상주를 예비하고 있는 진통일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낙원 상주를 잉태한 병성천
상주는 누가 뭐래도 경상도의 으뜸이다. 1천300만 경상도 사람들의 이름이 상주와 경주에서 딴 것은 예사롭지가 않다. 우리나라 국가가 태어날 때부터 상주는 성읍국가로 성장을 시작했다. 병성천변의 '사벌국'과 이안천변의 '고령가야'는 그냥 있었던 역사가 아니다. 삼백으로 먹고살기 좋은 자연환경이 바탕이다. 물 좋고, 먹고살기 좋은 곳. 사람들은 고대부터 그런 땅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상주는 바로 그런 낙원이다.
병성천은 낙원인 상주를 잉태한 모태다. 병성천에는 큰 지류 3개가 있다. 북천, 외서천, 동천이다. 옥산 청리를 거쳐 상주 시내 서남쪽을 휘감고 들어온 병성천은 시내 남쪽에서 북천을 만난다. 북천은 길이 26㎞. 모서면 석산리 373m 지점 서쪽에서 발원해 상주시내 서보, 상산관, 법원 앞, 상주중 앞, 성신여중 앞을 가로질러 상주시내를 북쪽으로 휘감아 돌아 병성천에 흘러든다.
외서천은 우복 정경세 선생의 종가가 있는 외서면 우산재에서 시작해 세천을 거쳐 사벌에서 동천과 합류한다. 동천은 공검 오태못에서 시작해 공검지를 거쳐 사벌 덕담에서 외서천과 합류해 흐르다 북천과 만난 병성천과 상주시내 남쪽 끝에서 합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넓은 평야와 유서 깊은 호국문화
병성천은 넓은 상주평야를 만들었다. 삼백 중 제1백으로 쌀이 많이 생산된다. 60㎢도 안 되는 사벌면의 쌀 생산량이 910㎢에서 생산되는 이웃 문경시의 생산량보다 많다는 이야기는 상주평야의 광활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병성천은 고대문화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사벌왕국의 유적지는 상주의 자부심을 드높이기에 충분하다. 사벌면 화달리의 전사벌왕릉(傳沙伐王陵)과 화달리 3층 석탑은 고대부터 이 땅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병성천변에는 임진왜란과 관련해 호국의 흔적들이 상주의 혼을 일깨우고 있다. 북천변의 임란전적비와 사벌면 금흔리의 충의사가 대표적이다.
왜적이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3일 중앙군이 상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관병은 불과 60여 명. 억지로 모병해 800명의 민병이 모였다. 훈련도 못 한 민병들이 채비도 하기 전 일본군 1만7천여 명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상주로 왔다. 순변사 이일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상주 판관 권길, 호장 박걸,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경군과 사근도 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이 죽기로 맹세하고 '임란북천전적지'에서 역전 분투했다. 그러나 중과부적. 모두 호국의 영령으로 산화하고 말았다. 이 일을 안 선조는 상주 전역에 부역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내려, 상주는 왕의 은전을 입은 우리나라 유일한 곳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장 정기룡 장군은 상주판관에 부임해 왜군과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해,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기룡'이라는 말이 나왔다. 경남에서 태어났으나 20세에 상주로 이사를 왔고, 25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임란 때는 30세 전후였다. 장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60여 회나 치르면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명장이었다. 50명의 기병으로 수천 명의 왜적을 격파한 적도 있으며 뛰어난 지략으로 겨우 400명뿐인 군사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적 10만 명을 이틀 동안 꼼짝 못하게 하고 수십 만 백성들을 피란시켜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그의 묘소가 있는 상주에 충렬사를 짓고, 그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선조의 '장군이 없었으면 영남을 잃었을 것이요, 영남을 잃었으면 나라를 잃었을 것이다'란 말은 지금도 유명하다.
◆병성천의 인물들
병성천은 호국 인물 외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선생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소재 선생은 대윤(大尹)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본관은 광주.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지낸 홍(鴻)이다. 장인인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웠으며, 휴정(休靜) 등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소재 선생의 문적(文籍)이 사벌면 삼덕리에 9종이 보존돼 있다.
우복 선생은 1563년 상주에서 태어나 1586년(선조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해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후 1633년에 별세했고, 좌찬성을 증직받았다. 우복 선생은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학파의 거두였으며, 1592년(선조 25) 6월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에게 어머니와 동생 정흥세가 피살되는 가운데도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기도 했던 충신이었다. 정경세 자신도 어깨에 화살을 맞고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8월에 의병장 이봉(李逢)의 참모관이 되어 병사와 군량을 모집해 전장에 나섰던 선비였다. 외서면 우산리에 선생의 종택이 있고, 사벌면 묵하리와 청리면 율리에 유허비가 있다.
◆공갈못과 습지
병성천의 지류인 동천 중간부에는 공갈못 습지가 있다. 공갈못은 삼국시대 때 축성된 우리나라 3대 못이었으며, 관개면적이 267.2정보나 된다. 이곳에는 예부터 연꽃이 만발했는데, 이는 중국의 전당호와 비슷하다고 시인묵객들의 감탄시가 있었고, '공갈못 노래', 일명 공갈못 채련요(採蓮謠)는 상주를 시발로 낙동강 연안과 전라도에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녀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게/ 이내 품에 잠자 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 가요….'
경상북도는 이곳을 중심으로 습지를 복원해 새로운 생태문화자원으로 준비 중이다.
◆병성천과 국내 최고의 자전거 고장
병성천은 자전거처럼 서서히 흐른다. 사방이 평야지대인 상주벌엔 자전거가 사람들의 발 노릇을 했다. 자전거가 녹색성장의 표본으로 떠오른 지금 상주는 그 자전거의 본향이다.
병성천은 유장한 역사와 그 역사에 담긴 많은 문화들을 안고 자전거처럼, 평야의 느림처럼, 상주 사람들처럼 서서히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사액서원인 도남서원은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吾道將行於南方)는 데서 비롯됐으며, 조선 유학의 전통은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탄생한 서원이다.
낙동강 물줄기와 병성천의 물줄기가 삼수(三水)로 만나 부둥켜안는 이곳에 지금 상주보가 완공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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