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팔현마을 향나무와 청백리 문평공 전백영(全伯英)

오랜 세월 묻혀있던 잡목 속의 몇 그루

대구 망우당공원에 있는 고모령노래비가 있는 곳에서 팔현마을~고모역~가천을 이어 성동마을의 고산서원까지 이어지는 길 주변의 문물과 역사자원에 대한 조사를 해본 바 있다.

그때 만난 팔현마을의 박병도(朴炳道'74)님에 의하면 마을 이름 팔현은 "고개 옆에 정씨 성을 가진 역적 무덤 양쪽의 향나무가 팔(八)자 모양으로 생겨서 팔현(八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유래가 적힌 마을 앞 비석을 보라고 했다. 1993년에 세운 '범죄없는 마을' 비였다.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무덤의 주인공은 역적이 아니고 '조선 초 판서 정숙영'이라는 분이었다. 이름을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정숙영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인데도 인명록에 없다는 것은 뭔가 잘못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모동 쪽의 이야기를 더 발굴하기 위하여 일단 접어두었다.

'조선 태종조 예조판서 문평공 전백영에 관한 고찰'의 저자 구본욱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평공은 고모 출신이니 비록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흔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꺼이 동의하여 후손 한 분을 모시고 왔다.

1988년,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가 펴낸 '우리고장 대구'(지명 유래) 고모동편에 의하면 '전백영은 이곳에서 태어나 파동으로 이사 가기 전인 1369년(공민왕 18년) 살던 집에 심은 향나무가 있었는데 일본인이 캐가고 지금 키가 작은 몇 그루가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어 함께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행한 후손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저자 구 선생과 함께 팔현마을로 향했다. 일대를 뒤진 끝에 잡목 속에 섞여 있는 몇 그루의 향나무를 발견했다. 팔자(八字) 형은 아니었으나 문평공이 심은 나무에서 자라난 맹아가 분명해 보였다. 팔현이 옛 고모 땅이었던 것을 감안하고, 유래비의 판서 정숙영을 '판서 전백영'의 오기로 볼 때 이곳은 '생가 터'가 틀림없다.

공은 1345년(고려 충목왕 1년) 수성구 고모에서 태어나 파잠(巴岑'파동)으로 이거하면서 아호마저도 파동과 신천에서 따와 파계(巴溪)라고 했다. 정몽주로부터 글을 배워 27세 때인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문과에 급제했다. 초임부터 관료들의 비리와 왕의 실정에 대해서 바른말을 하는 간관(諫官)을 맡았다. 권신 이인임을 탄핵했다가 그들의 세력에 밀려 10여 년간 하동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간언의 정당함이 알려지면서 수원부사 좌'우사의로 다시 복귀했으나 이도 잠시 충청도 결성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조선의 개국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공의 관직은 대체로 순풍을 만난다. 그러나 초기에는 역시 간의대부 즉 언관이었다. 그 후 병조전서, 풍해도(황해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등을 역임했다. 1399년(조선 정종 1년) 공의 나이 55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하던 중 왕명으로 조정에 복귀, 정사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하며 기강을 확립하는 오늘날 검찰총장과 역할이 비슷한 대사헌(종2품)을 맡았다.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임금이 불교를 배척하는 이유를 묻자 '공자의 도는 인의(仁義)를 중시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어 '임금의 배워야 할 학문으로는 대학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1400년(정종 2년) 마침내 고향땅을 다스리는 경상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1404년(태종 4년)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使)로 명나라 서울에 가서 새해를 축하하고 세자의 책봉을 청하였다. 그해 7월 예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1406년(태종 6년) 다시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1412년(태종 12년) 건강이 좋지 못하여 공직을 그만두고 낙향하고자 하였더니 태종이 허락하면서 '전 재신(全 宰臣)이 중외로 근무하여 공로가 있는데 지금 돌아간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말 먹이와 간식을 주어 보내라'고 하였다.

내직에 있을 때는 왕을 잘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하고 외직에 나가서는 청렴한 목민관으로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했던 공은 그해 68세로 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3일 동안 조회를 금지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장례를 지원하도록 하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대구부가 읍지를 만들면서 조선시대 대구인물 조에 맨 처음 등재해 공을 기렸다. 이번 발품을 통해 우리는 오랜 세월 묻혀있던 문평공의 생가 터와 그가 수식(手植)한 향나무를 확인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런 작은 노력에 의해 대구의 향토사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니 앞으로 할 일이 더욱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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