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유선여관

어떤 음보다 순수하고 고귀한 '개울가 자연음 소리'

산 속 개울가 여관에서 딱 하룻밤만 자고 싶다. 그곳은 방안에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이 딸린 것도 아니다. 멋진 침대가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조명등이 근사하여 춘정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반질반질한 장판 맨바닥이다. 장작 군불을 때 아랫목이 따끈하다. 창호지를 바른 문 밖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밥 짓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이다.

그런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장거리 산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팔베개를 베고 누웠으면 남향으로 터져 있는 문에서 들려오는 개울물소리가 너무 요란하여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마침 때는 음력 보름. 휘영청 푸른 달이 대문 밖 벚나무의 그림자를 마당으로 들여보내 짚 멍석을 화문석 무늬 흉내 내도록 하는 호젓한 여관의 초저녁. 그런 여관에서 딱 하룻밤만 자고 싶다.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계곡 물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달빛 소나타를 솔로로 듣고서도 술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이미 풍류객이 아니다. 아니다, 인간이 아니다.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여 개다리소반에 열무김치와 풋고추 된장 그야말로 박주산채를 기대하면서 "멍석 위에 술상 좀 봐 줘요" 하고 소리친다. 둥근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그대로 등불이다.

하룻밤 자고 싶은 여관은 대둔사 입구 너부내 가에 있는 유선여관(061-534-3692)이다. 내가 굳이 이 여관에서의 일박을 희원하는 것은 온돌방의 분위기나 한정식 상에 나오는 푸짐한 안주 때문은 아니다. 물소리와 물안개 때문이다. 개울가 암반 위에 닦은 집터에서는 자기(磁氣)가 터져 나와 자고 나면 우선 몸이 개운하다. 또 개울에서 흘러가는 물소리를 깨어서도 듣고, 자면서도 들으면 일체의 망상이 사라진다. 삼백예순 날을 하염없이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무슨 큰 번뇌가 있을까마는 하릴없는 나날이 곧 망념(妄念)의 진원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은 계속된다. 밤새도록 비몽사몽간에 물소리를 듣다가 잠이 깨면 이른 새벽인데도 더 이상 잠은 오지 않는다. 개울물소리는 볼륨을 높여 더 큰 소리로 흘러가고 그 소리를 따라 목에 수건 하나를 두르고 개울 바닥으로 내려선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이보다 더 아름다우며, 드보르자크의 신세계가 이 개울물 소리를 감히 능가할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 자연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설사 스트라디바리우스란 명품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 해도 원음을 앞지를 수는 없다. 활이 현을 퉁기거나 문질러 얻은 음을 통 속에 가뒀다가 토해내는 깽깽이 소리는 자연 음 앞에서는 그저 통속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고 자연의 소리는 어떤 음보다 순수하고 고귀하다.

오솔길은 아니지만 대둔사 쪽으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쉬엄쉬엄 올라가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밤을 버텨온 냉기가 아침 온기에 밀리기 시작하면 개울물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물안개다. 음력 칠월 보름인 백중 무렵에는 지리산을 비롯한 남도의 모든 산들이 연하(煙霞)를 피워 올리기에 골몰한다니 유선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면 이때가 최적기가 아닌가 한다.

정말이지 그런 여관에서 딱 하룻밤만 자고 싶다. 이렇게 도시에서만 서성대지 말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한시바삐 남도여행길에 올라야겠다. 중국 육조시대에 종병(375~443)이란 이는 젊은 시절에 산수간을 돌아다니며 즐기다가 늙어 노쇠해서는 산천을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옛날에 가 보았던 산천을 그린 산수화를 방안에 펼쳐놓고 상상으로 그림 속을 거닌 것을 '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와유(臥遊)라 했다. 적어도 나는 그 신세는 면해야겠다. 유선여관의 제법 큰 방에는 줄탁동시(啄同時)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뜻은 알에서 깨어나려는 병아리가 껍질을 깰 때 어미가 밖에서 쪼아 주어야 제대로 부화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그런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는 생각이 안에서 소리치면 밖에 달려 있는 두 다리가 얼른 알아채고 성큼성큼 걸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와유(臥遊) 와식(臥食) 와음(臥飮),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씀들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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