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항구 묵호' 없어졌지만 아직도 어디에나 있다

묵호/이동순 지음/시학 펴냄

묵호의 사계절·음식·아픔과 사랑 등

일상 생활을 詩語로 쓴 한편의 소설

이동순 시인(영남대 국문학과 교수)이 14번째 시집 '묵호'(墨湖)를 냈다. 시인이 '시로 쓴 묵호 풍물화첩'이라고 언급하는 것처럼, 이번 시집에는 묵호의 사계절, 묵호의 음식, 묵호사람들의 삶과 눈물, 아픔과 사랑이 두루 담겨 있다. 시어를 동원해 쓴 한편의 소설처럼 와 닿기도 한다.

'저녁 뱃고동 소리 들려오면/ 가뜩이나 먹빛 바다 더욱 검어지네 (중략) 어스름 속에서 등대는 슬픈 얼굴을 하고/ 종일 뱃일하다 돌아온 남편과/ 종일 오징어 배 따고 돌아온 아내가 싸우는 소리를 듣네(하략)' -묵호등대- 중에서

묵호등대는 묵호의 사람살이를 밤새 비추었다가 흑백사진처럼 펼쳐 놓는다. 종일 뱃일을 하고 돌아온 남편과 종일 오징어 배를 따고 돌아온 아내, 가족을 위해 종일 일만 했던 남편과 칼 잡은 손을 쉼없이 놀렸던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 부부싸움을 한다. 가족이란 그런 것일 거다. 싸우는 대신 다정한 얼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면, 가족이 아니라 손님일 것이다. 그렇게 핏대를 올리며 싸우던 남편과 아내는 다음 날 아침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를 타러, 오징어 배를 따러 바다로 나간다. 가족은 그래서 일상이다. 일상은 때때로 지루하고 비루하지만, 우리 삶의 근거다.

'대관절/ 언제까지 칠 것인가/ 마구 몰아오는 눈바람은/ 세월마저 얼어붙게 하는구나/ 출어금지에 묶여 잠시 한가해진 어부들은/ 부둣가 주막에 모여 앉아/ 소주에 취한 눈으로 바다를 본다(하략)' -눈보라- 중에서

이동순 시인이 그려내는 묵호는 지금 없다. 빨간 루주에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나포리 다방의 레지도, 장미다방도 없다. 종일 나포리 다방에서 시간을 죽이던 아버지도, 몹시 화가 나서 아버지를 찾아오라며 등 떠밀던 어머니도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다 떨어진 가방에 몸뻬 입고 동동구리무 팔던 복순네 어멈도, 눈가루 날리던 날 가오리연을 만들어주던 아버지도 가시고 없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던 시외버스 정류장 옆 묵호 카바레는 진즉 사라졌고,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변했고, 묵호(墨湖)라는 지명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묵호는 여전하다.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지만 어머니 손에 밀려 나포리 다방으로 가던 그 난감한 길을, 어두컴컴한 다방에서 아버지를 찾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때를, 담배 연기를 긴 한숨처럼 뿜던 아버지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 풍경이 어디 바닷가 동네 묵호에만 있었을까. 그러니 지지고 볶고, 난처하고 가난했던 고향은 어디나 묵호인 셈이다.

시집은 1부 묵호사람들의 가난과 슬픔, 2부 묵호사람들의 일상, 3부 묵호의 토속 음식문화, 4부 묵호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을 노래한다. 이동순 시인은 "묵호를 통해 우리고향의 전형을 노래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179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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