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수목장 숲에서-푸른 호랑이 3

잠시 전에는 시인이었는데 지금 나무가

된 나무가 서 있었다 그 앞에 잠시

전에는 나무였는데 지금 시인이 된 시인이 서 있었다

잠시

시인이었을 때를 기억 못하는 나무 앞에서 잠시

나무였을 때를 기억 못하는 시인이 서 있었다 잠시

지나간 바람을 기억 못하는 나무들이 잠시

자신의 이름이 희미하게 새겨진 발찌를 차고 잠시!

무뇌아처럼 서 있는

숲의 한쪽에

  이경림

삼천리 금수강산이 온통 무덤으로 뒤덮이는 건 좀 곤란한 일, 그래서 어느 식자들의 의견에 따라 서둘러 수목장의 시대가 열리었지. 그리하여 잠시 전에 시인이었던 누구누구 회사원이었던 누구누구 나무속으로 걸어들어가 이름표를 단 나무가 되었지. 그러자 잠시 전 나무였던 나무들은 나무 밖을 걸어나와 시인이 되고 회사원이 되었지. 몸 바꾸었지.

나도 나중에 조용히 걸어들어가 나무나 될까. 나무가 날 받아줄까. 아아, 안 되겠다. 미안해서 안 되겠다. 나무가 내 신경질을 배우면 어쩌나. 나무가 내 불안을 배워 자꾸 떨리면 또 어쩌나. 그래서 난 나무에게도 강에게도 갈 수가 없겠구나.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돌멩이에게로 갈까. 지나고 나면 그만일 바람에게로 갈까. 아니지 그들도 그들의 숨결이 있고 기억이 있을 테니 나는 그저 말 없이 이름 없는 것에게나 깃들어야겠네. 이름 없는 것, 그건 바로 나 자신임을 알고 있으니. 의탁하는 일도 이승의 누구에겐가 신세를 지는 일, 하여 지겹지만 내가 내게 깃들 수밖에. 나를 좀 받아 주겠니, 나여. 시간의 저 숲 밖으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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