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재박의 작명탐구] 시각장애인 1호 박사 강영우

"나의 약점이 나의 강점이다"

인생이 평화로운 나날들의 연속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좀 지루하기는 해도 얼마나 좋은 일일까. 그러나 삶은 때로 흉악한 괴물의 모습으로 찾아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무참히 짓밟아 놓기도 한다. 갈수록 삶이 고단해져만 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불행 앞에서 얼마나 절망하기 쉬운가. 그로 인해 삶의 끈을 놓아버리기까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건 이제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벼랑 끝의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는 희망의 빛을 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축구를 하다 축구공에 맞아 눈을 크게 다친 한 소년이 있었다. 2년 동안 치료와 두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결국 실명하고 말았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던 그의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아 소년이 시각장애인 판정을 받은 지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 앞날이 막막해지자 소년의 누나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하여 생계를 꾸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누나마저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8세에 다시 중학교로 돌아간 소년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였고, 명문대 문과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심리학 석사 학위와 교육철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고, 백악관 직속의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빛을 잃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밝은 희망의 빛을 되찾은 그의 이름은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 1호 박사인 강영우이다.

강영우(姜永佑)는 1944년 1월 16일 경기도 양평 출생으로, 중학교 시절 축구 골키퍼를 하다 날아오는 공에 눈을 맞아 망막이 파손되어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이다. 그는 실명 후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굳은 의지로 극복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3년 8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세계인에게 재활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한국인 이민자 중 미국 행정부의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끈기일 것이다. '강영우' 그의 이름은 목(木)과 토(土)의 기운이 강한 이름으로 그의 사주에는 비견(比肩)과 관성(官星)으로 작용한다. 비견이 관성을 만나면 관성에 동화되어 그 작용이 더욱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 이름에 관성이 강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 통제능력이 뛰어나며, 책임감과 추진력이 강하다. 또한 행동이 대범하여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닥쳐도 참고 이루어 모범을 보이니 직업으로는 군인, 경찰, 공무원 등이 제격이다. 남자에게 관성이 길하게 작용하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그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명망을 얻는 경우도 많다.

그의 이름대로 삶을 살고 있는 강영우 박사. 로라 부시 여사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설을 할 때 "맹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안마사나 점쟁이밖에 없었지만 나는 현재 4성 장군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정부의 공직자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던 그는, 미국 교육계 명사인명사전에 등록된 최초의 한국인 시각장애인이자, 자신의 약점을 최대의 강점으로 활용하여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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