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음악이 대마초파동 이후 시들해진 1979년, 의미 있는 한 장의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TV무대에서는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오직 라디오와 콘서트만이 음악활동의 영역이었던 때문인지 앨범의 주인공을 세간에서는 얼굴 없는 가수라고 불렀다. 고은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작은 배'부터 '행복한 사람''겨울비'로 이어지는 낮은 읊조림은 혼돈의 1980년대를 정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듯했다. 관조의 시어를 음악에 담아낸 사람은 조동진이었다.
영화학도였던 조동진이 음악계로 발을 옮긴 것은 아버지(영화감독 조긍하)의 사업실패와 죽음 때문이었다. 생계를 위해 '더 셰그린'(The Shagreen)이라는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미8군 무대에 서기도 했고 명동과 신촌의 통기타 살롱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 시절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같은 당대의 스타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천성이 언더그라운드였던 탓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스튜디오에서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노래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는데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김세환 같은 동료들에게 곡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대체로 조동진의 앨범이 5년 정도의 간격으로 만들어지는데 데뷔 앨범과 2집 앨범은 1년 간격으로 공개된다. 1집에 수록된 '행복한 사람'은 조용하지만 의미 있게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했고, 2집에 수록된 '나뭇잎 사이로'는 지금까지도 가을이면 애청되고 있다. 2장의 앨범은 한국대중음악계에도 온전한 싱어송라이터가 출현했음을 의미했고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이 당시 조동진의 집은 최성원, 전인권, 하덕규, 이병우, 함춘호 같은 음악인들의 아지트였다. 이들은 조동진을 구심점으로 새로운 음악을 창안했고 동아기획을 통해 앨범을 공개한다. 들국화, 시인과 촌장, 어떤날, 장필순의 앨범이 동아기획을 통해 쏟아지면서 이들은 '조동진 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가수로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TV 출연을 거부한 채 라디오와 라이브 콘서트만을 그들의 영역으로 여겼다. 소극장 라이브를 정착시킨 것도 조동진 사단의 성과였다.
조동진의 음악에는 영혼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어떤 감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서 있는 듯하지만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아쉬운 것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을 행복으로 여기던 조동진의 음악을 너무 오랫동안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땅에서 음악을 하는 것이 의미없기 때문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