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부부로 산다는 것
내 결혼생활도 근 25년, 그동안 한두 번 정도 '이혼'이란 단어를 입에 아니 올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행복한 부부로 잘 살아가고 있다. 이 또한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내 나이 열 살 남짓할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때아닌 초겨울비가 추적거리다 보니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워 우리 삼 형제는 일찌감치 방안에 들어앉아 저녁밥 생각에 들에 가신 어머니가 빨리 돌아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들에서 일찍 돌아오신 아버지는 "이놈들이 지 에미는 나무를 한답시고 산 비알에 엎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하시며 불호령이셨다. 이에 화들짝 놀란 삼 형제는 설멍한 바짓가랑이로 찬바람이 성성 이는 줄도 모르는 체 추적이는 빗속을 헤치며 어머니를 찾아 나섰고 오래지 않아 산모퉁이를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발견, 어머니로부터 초겨울비와 솔가리와 삭정이가 뒤범벅이 된 나뭇단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아버지의 노여움이 사그라지셨다. 그런 탓에 우리 삼 형제가 어머니에게 대거리로 덤벼든다는 것은 언감생심. 어머니의 말이 곧 호랑이 같은 아버지 말씀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어머니 사랑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현재 아흔인 어머니는 노인들이 흔히 앓는 관절염 등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다. 그러다 보니 명절 때면 역귀향으로 대구로 모셔야 하며 그동안 어머니가 극복 못 하신 것 중 하나가 차멀미다. '귀미테'를 붙이는 등 여러 가지 방법 중에도 물약이 최고라는 어머니, 삼 년 전 그날도 설을 맞아 대구로 모실 때였다. 엄동설한이라 차창 밖으로 칼바람이 에이는 통에 히터를 틀고 창문을 꼭 닫았다. 안동에서부터 탁해진 차내 공기 속에 잘도 참아 오시던 어머니가 다부터널을 지나는 순간 미리 준비한 비닐봉지를 입에 대시더니 급기야 토하고 말았다. 뜨끈한 공기 속에 풍겨 나는 느끼한 냄새는 아들이기 전에 은연중 속이 메스꺼웠다.
이윽고 도착한 집, 아버지는 문제의 비닐봉지를 들고 욕실로 들어가신다. 그때 나는 '오물인 양 여겨 변기에 넣어 버리시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데 잠시 뒤 "하이고 이 양반아, 그 더러운 것을 손으로 휘저어 틀니를 찾아 이렇게 깨끗하게 씻었어요!" 하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나는 지금껏 살아온 내 부부관계를 생각하며 스스로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수필 #2-미용실에서 있었던 일
낯선 동네로 이사를 와서 파마를 해야겠기에 미용실에 들렀다. 7년 단골로 다녔던 미용실은 "이번엔 스타일을 조금 바꾸고 싶은데"라고 하면 알아서 척척 해 주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 미용사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모를뿐더러 그 실력도 알 수 없는 상태라 조금 두려워하며 기다리는 동안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몇 호에 사세요?"
처음 본 나에게 서먹해하지도 않고 몇 호에 사느냐고 대뜸 물어왔다. 당연히 이 아파트에 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사는 호수를 말해주니 이번에는 몇 동이냐고 물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호구조사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생각하며 동을 가르쳐 주었더니 "아, 그 통장님 이사 간다더니 가셨구나!" 하면서 그 가정사에 대해서 줄줄이 쏟아내고 있었다. 아파트 전 주인의 가정사를 알 필요도 없거니와 미용사가 전해주는 불필요한 제3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개인정보가 저렇게 새어나가는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이 미용실에 들어섰지만, 나의 정보도 저렇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섣불리 단골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마가 끝날 때까지 세 시간가량 앉아 있다 보니 미용실이란 정보창고인 것 같았다. 여자들이 아무리 수다 떠는 걸 좋아하지만 분명 이건 아니다. 내가 상대를 모르는데 상대방이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안다면 기분 나쁜 일이다. 그 사람이 나와 상관있건 없건 필요 이상으로 알 것도 없고 알릴 것도 없다. 세상 살아가면서 '말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하루였다.
김원희(대구 북구 태전동)
♥시 #1-잊어버린 粉 香氣
그녀에게서 분 향기를 느꼈다.
40여 년 잊어버린
은은한 향기.
어머님께 사주신
아버님의 코티 분.
장미송이가 그려진 粉廓을
가슴에 품으며
하늘만치 좋아하시던
어머님.
장롱 깊숙이 묻어두고
모처럼 꺼내어
손거울 마주 보며
톡톡 찍어 바르셨다.
새색시 같다는 아버님의 말씀에
연 다홍 수줍은 미소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품어 낼 때면.
열 살배기 소년은 분 향기에 취했다.
아직도 그 粉이 있음일까?
잊어버린 향기를
어머님께 드리고 싶다.
양종균(대구 수성구 상동)
♥시 #2-가을걷이
산은 붉으래 치장을 하고
감남근 황금을 잉태했네
산들바람이 옷깃을 여밀 때
가을은 어깨에 와서 앉네
꿈꾸러 가는 햇살이
나뭇가지를 탈 때에
신농씨 고운 손이
황금 알을 낳는다
먼 산 저녁놀은
하늘 안고 춤을 춘다
땅거미 드리워진
논두렁길
낫을 쥔 아낙네의
종종걸음
별빛을 따라 찾아드는
희망의 보금자리
거기엔 꿈이 영그네
행복이 흐르네
박효준(대구 달서구 송현2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박선민(대구 달서구 유천동) 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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