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향인사] 조기철 관세법인 형도 대표관세사

"관세업계는 승자독식 구도…바빠야 살아남지요"

하마터면 인터뷰를 못할 뻔했다. 지방 출장을 갔는데 약속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무척 다급하고도 미안한 목소리. 늦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고 했는데 업무를 뒤로 하고 부리나케 상경했다. 그는 바빴고, 일은 확대일로에 있었다.

한국세관 옆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조기철(50) 관세법인 '형도' 대표관세사를 만났다. 회사원에서 사주(owner)로, 다시 영업사원에서 법인 대표로 변모한 '기복 심한 삶'을 들으니 그의 '바쁨'이 이해가 됐다. 승자독식 구도라는 관세업계의 특성상 그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으니 시장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고 인터뷰 끝에 말했다. 4명에서 시작한 관세사무소가 32명이 일하는 법인이 됐으니 책임감이 무척 클 것이다.

대학 재학 중 이미 관세사 시험에 합격했던 그는 LG상사에 입사해 무역을 배웠다. 그리고 서른 한 살에 창업해 서울 목동에 사무소를 냈다. 하지만 그 해 영업매출은 0원. 진입장벽은 높았고 그는 어렸다.

"당시 관세사는 시험 합격자 부류와 세관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경험이 있는 창업 부류로 나뉘었는데 주류는 후자였죠. 몇 개월 하다 그 자리를 접었습니다. 끼어들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왕 그렇게 된 것, 더 큰 시장으로 가자며 김포공항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통관, 환급, 심사, 쟁송, 컨설팅 업무에 발군의 능력을 보이는 후배들을 섭외하기 시작했고 일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관세 컨설팅에 주력했는데 빛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IMF사태가가 터졌고 그는 다시 사업을 접어야 했다.

"타격이 워낙 커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국제운송업체의 영업이사로 근무했는데, 말이 이사였지 영업사원이었습니다. 빚이 많아 월급가지고는 생활이 어려웠죠. 하지만 그 4년간 저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어떤 조직이 성공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좋은 거름이 된 시기였죠."

2002년 그는 다시 창업에 도전했다. 시스템과 전산에 투자해 직원의 불필요한 업무를 줄였다. 홈페이지에서 고객의 모든 서류가 조회, 출력되도록 했고 수출입통계를 계산해 주면서 고객이 크로스체크만 하면 성가신 일을 더 할 필요가 없도록 배려했다. "우리 회사는 고객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합니다"라고 어필하면서 일이 많아졌다. 사람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않았다.

"회사는 저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죠. 그래서 직원의 서비스 마인드를 높이고 영업능력, 수주능력을 키우도록 사원 복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작은 회사지만 체력단련비를 주고, 자기계발비를 주면서요. 자녀 학자금을 위해 기금으로 돈을 모으고도 있습니다."

공항, 인천, 부산 사무실에 이어 지난 6월 서울사무소를 냈다. 현재 하이트, 크라운, LG, SKC, 매일유업 등 100여 개 업체와 계약을 맺었고 직원도 늘었다. 조 대표는 항상 "직원이 생각하는 월급에서 10%를 더 준다는 신념으로 일한다"고 했다. 직장 만족도가 높아지면 업무 효율이 증가한다. 직원들이 신명나게 일하는 회사가 되도록 후배 관세사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그는 "자유무역협정(FTA)은 우리에게 블루오션"이라며 "관세사와 변호사의 일이 늘어나는데 FTA 업무를 누가 먼저 했는가에 따라 새 시장 개척의 선두주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그가 바쁜 이유랬다. 알고 보니 그는 대구의 자동차부품업체인 상신브레이크와 삼성SDS, 안진회계법인과 함께 자동차 부품과 관련한 FTA 원산지 관리시스템 구축에 나서고 있었다. 선두주자로서의 첫걸음이란다.

조 대표관세사는 경북 영천 출신으로 영천초, 평리중, 성광고를 거쳐 경북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서상현기자 subo80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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